이번 여행을 준비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르셀로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 유명한 축구팀 FC바르셀로나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전부였다. 하지만 여행을 준비하면서 바르셀로나야말로 반드시 찾아야 할 도시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셀로나가 스페인 제 2의 수도여서도 아니고, 아름다운 지중해 연안 도시여서도 아니며, 화려한 분수쇼와 플라멩고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바르셀로나가 배출한, 아니 바르셀로나를 조각한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이 코르네트 (Antonio Gaudi y Cornet)' 때문이다.
바로셀로나 산츠역에 도착한 시각은 대략 7시 30분경, 마드리드 차마르틴역을 떠난 지 꼬박 9시 30분만이다. 서머타임이 끝난 때문인지 바깥은 아직 어둑어둑하다. 숙소 체크인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라 우선 역 안에 있는 코인라커에 짐부터 풀어 넣고, 잠시 요기라도 할 참으로 역 안을 둘러본다.바로셀로나 산츠역은 마드리드 챠마르틴 역 못지 않았다. 승차장도 많고 식당도 여러 개다. 그 중 가장 향긋한 커피향이 풍겨나오는 식당에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한다. 보통 아침은 자주 거르는 편이지만, 차가운 아침 바람을 맞아서인지 괜시리 허기가 진다.
샌드위치를 입하나 가득 물고 천천히 바르셀로나 지도를 펼쳐본다. 머리 속으로 루트를 다시 한번 그려 보고, 첫 번째 행선지로 결정한 구엘 공원으로 가는 방법을 손으로 되짚는다. 행선지와 방법을 꼼꼼하게 살펴 본 뒤 곧바로 구엘공원으로 향하는 전철에 몸을 싣는다.
8시가 갓 넘어서인지 전철역은 출근, 혹은 등교하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 혹시라도 휩쓸려 내리지 않도록 조심 조심하며 목적지인 3호선 발카르카(Vallcarca)역에 내렸다. 예상과는 달리 같이 내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 흡족한 미소를 품고, 안내판을 살펴본다.
“그래, 이 방향이군.” 구엘공원으로 향하는 출구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부터다. 구엘공원으로 가는 길은 꽤 가파른 언덕길이다. 다행히도 에스컬레이터가 골목 중앙을 관통하고 있었지만, 내가 찾은 날은 고장으로 기계가 멈춰 있었다.
밤새 쿠셋에 누워왔다고는 하지만, 편안한 집에서 느긋하게 숙면을 취한 게 아닌지라 아직 몸이 찌푸둥하다. 게다가 안먹던 아침까지 먹어 배속도 벌써부터 전쟁이다. 이런 와중에 이런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자니, 첫 발을 떼기 전부터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우글대는 관광객들이 없을 거란 한가닥 희망을 품고서, 마침 에스컬레이터를 고치기 위해 출근하는 수리공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언덕을 오른다.
드디어 도착한 구엘공원. 생각과는 달리 그저 뒷동산 같은 분위기다. 특별히 신기하지도, 가슴 벅찬 감동도 없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바르셀로나도 희뿌연 안개 탓에 흐릿하기만 하다. 아침 운동 나온 사람들과 머쓱한 인사를 나누면서 그렇게 걷기를 10여분, 드디어 수많은 여행객들이 칭찬에 칭찬을 마다 않던 구엘공원의 숨막힐 듯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명불허전’이라는 표현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장소가 있을까? 구엘공원은 분명 인간의 손으로 만든 곳이지만, 어느 누구도 손대지 않은 듯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마치 어릴 적 찰흙으로 빚어 놓은 듯한 아기자기한 모양들과 원초적인 구조는 약간 장난스러우면서도, 극도로 세련된 느낌을 준다.
가우디의 손길은 단순히 건물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산책로는 물론이고, 벤치와 화단에 이르기까지 그의 구상(그는 미래의 전원도시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은 공원 전체에 골고루 녹아 있다. 그리고 그의 구상대로 구엘 공원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가 녹지를 품은 듯한 형상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가우디미술관이 문을 닫아 그의 작업실을 직접 엿볼 기회는 없었다는 것이다.
구엘공원을 벗어나 두 번째로 향한 곳은 가우디의 또 다른 걸작인 싸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가족대성당’으로 알려진-이다. 전철을 나오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어떠한 수식어가 이 불가사의한 건축물을 표현할 수 있을까? 미완성마저도 의도한 듯 싸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전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싸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외관이 “숨이 멎을 듯한 경이로움”을 체험케 한다면, 성당의 내부는 “한 없이 솟구치는 경외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지하에 위치한 성당 설계도를 보는 순간 또 한번 격렬하게 요동친다. 설계도에 그려진 기호들은 몰라도 좋다. 이를 형상화한 미니어처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우디가 상상해 낸 놀라운 ‘창조물’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이와 같은 감동을 안고 올라선 첨탑 위 풍경도 자극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바르셀로나 시가지는 구엘공원에서와는 달리 정오의 태양을 머금은 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비록 안전장치 하나 없어 조금은 아찔한 기분이었지만, 마치 곡예하듯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기분은 짜릿하다 못해 진땀마저 흐르게 만든다.
구엘공원과 싸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만으로도 바르셀로나를 찾은 목적은 이미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아직 가우디의 작품 하나가 더 남았지만, 조금은 숨돌릴 여유가 필요했다. 싸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광장에 앉아 느긋하게 사람들을 바라본다. 구리빛 피부에 웃는 얼굴들이 무척이나 평화로운 느낌이다. 나 역시 그들의 미소를 보며 잔뜩 고조된 긴장감을 풀어본다.
이번 행선지는 가우디의 또 다른 작품인 까사 밀라, 구엘 저택이다. 지도를 꺼내 위치를 확인하고 지하철을 나선다. 너무 긴장을 풀어버린 탓인지, 아니면 여전히 가우디에 흥분한 상태인지, 그만 방향 감각을 잃고 말았다. 분명 이 근처일텐데 이상하게 같은 곳을 맴돈다. 결국 버스에 오른다. 그 순간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까사 밀라. 내려야지 하면서도 다리가 떨어지지 않아 결국 지나치고 만다.
버스는 까딸루냐 광장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순간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내가 지금까지 점심을 굶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주위 모든 식당들의 간판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까딸루냐 광장 근처에는 먹거리가 많다. 맥도널드부터 스페인 전통 레스토랑까지 다양하다. 내친 김에 그토록 기다렸던 빠에이야를 먹기로 했다. 해산물이 곁들여진 빠에이야는 일종의 철판볶음밥이라고 보면 된다. 맛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아니 오히려 정말 맛있게 한끼를 채우기에 충분하다.
든든한 식사 탓에 기분까지 좋아진다. 눈앞에 펼쳐진 근사한 람블라스 거리를 걷는다. 식사 뒤 느긋한 산책은 확실히 ‘명약’이다. 기분도, 몸도 한결 가볍다. 람블라스 거리는 마치 시장 같은 분위기다. 도심 한 복판에 위치해 있으면서 차도보다 인도가 더 넓은 이 거리에는 수많은 행위 예술가들이 거리에서 자신만의 공연을 뽐내는가 하면, 거리 곳곳에는 생전 처음 보는 식물이나 동물들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지중해가 보인다. 바르셀로나에서 바라본 지중해는 정말 포근했다. 날씨도 좋았지만, 따사로운 해안가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인파와 거리 곳곳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이들이 스페인의 한가로운 오후를 대변하고 있었다. 이 곳은 휴양지가 아니라 항구였던 관계로 모래사장은 없었지만, 따뜻한 느낌의 목조 건물들이 해안가에 늘어서 있어 아무데나 누워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따뜻한 지중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갈 곳은 바르셀로나 대성당. 싸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먼저 보지만 않았더라도 이 성당의 매력에 흠뻑 빠졌겠지만, 싸그라다 파밀리아의 여파로 가슴벅찬 감동은 애초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성당 전체가 마치 모기장으로 뒤덮인 듯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도 이 곳 역시 분명 찾아볼 만한 명소임에는 틀림없다. 특히나 이 곳 옥상에 올라 바라보는 바로셀로나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고딕지구를 지나 피카소 박물관도 들러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휴관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바로 근처에 있는 시타델라 공원으로 향했다. 솔직히 여행을 하면서 피곤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이다. 아무리 마음은 즐겁더라도 몸은 피곤하게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쾌적한 장소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다.
시타델라 공원은 그러기에 충분했다. 정말 아름다운 분수를 바라보며 머리를 식히고, 잠시 산책을 하다가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 벤치에 앉아 재잘거리는 백조와 오리들을 바라보다보면 금새 기분도 상쾌해진다. 이 공원은 가족들이 많이 오는 덕분에 조용하다는 것 또한 여행자들에게는 행복이다. 이 곳에서 오후 시간을 모두 보내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다시 무작정 버스를 올랐다.
이번에도 어딘가 좋은 곳이 있으면 그냥 내릴 터였다. 그러던 중 낯설어 보이면서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는 건물을 찾았다. 궁금증을 견딜 수 없어 내린 이 곳은 바르셀로나 대학교. 건물 하나가 전부는 아니겠지 싶어 이리저리 둘러봐도, 보여야 할 캠퍼스는 없고 오히려 아이들을 위한 간이 놀이터가 코 앞에 놓여 있다. “지역 주민들과의 대화하는 ‘열린 캠퍼스’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며 바르셀로나 산츠역으로 향한다.
정말 열심히 걷고 걸었던 하루다. 코인라커에 넣어 둔 짐을 꺼내 들고 숙소로 향한다. 피곤하면서도 알찬 하루였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머금어 진다. 바르셀로나, 언젠가 다시 한번 찾으리라.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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