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서 대기중인 피사행 기차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로 크게 북적거렸다.
푹신한 의자는 포기한 채 출입문 옆에 있는 보조 의자에 앉는다. 워낙 낡은 기차라 그런지 유난히 시끄럽고 덜컹거린다. 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이라도 없었다면 도중에 내려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1시간쯤 지나 도착한 피사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피사 중앙역(Pisa Centrale Stazione)은 스페인의 그라나다 역만큼이나 단조롭고 아담하다.
중앙역 앞을 지키는 분수대 또한 고전적 스타일이 아닌 현대적 분위기라 과연 제대로 내린 것인지 자꾸만 뒤돌아보게 된다.
피사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피사의 사탑이 있는 캄포 데이 미라콜리(기적의 언덕)다. 기차역에서부터 걸으면 약 30여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걸 알면서도 괜히 시간 낭비하기 싫어 버스에 오른다.
버스에서 바라보이는 피사 시가지는 오래된 건물들이 품격 있는 모습으로 위용을 자랑한다. 중간 중간 새로운 건물들도 눈에 띄지만, 이탈리아인들의 안목을 자랑이라도 하듯 옛 것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굳이 안내 방송이 없어도 피사에서 캄포 데이 미라콜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버스 승객 중 대다수가 이 곳에서 하차하고, 또 버스 기사도 친절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버스 하차장에서 고풍스런 아치형 입구를 들어서면 좌측에 눈부신 흰색 대리석 건물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 곳이 바로 피사의 사탑이 있는 캄포 데이 미라콜리다.
피사에 도착한 시각은 대략 10시경이었는데, 이 시간에도 캄포 데이 미라콜리 광장엔 사람들로 가득하다. 눈부신 걸작들을 올려다 보는 감동도 있지만, 다양한 국가, 연령대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다. 특히 무너지는 피사의 사탑을 손바닥으로 지탱하는 포즈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보면 괜시리 입가에 웃음이 감돈다.
세례당과 두오모를 지나 서둘러 사탑으로 향했다. 현재 수직 축에서 5.4미터 가량 기울어진 세계 7대 불가사의 피사의 사탑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한 번에 스무명 밖에 입장하지 못하는 이 곳에 운이 좋아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게 크다. 하지만 미처 다 다가서기 전에 이 꿈은 버렸다.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열주가 아치를 받치는 구조로 8층을 형성하고 있는 피사의 사탑은 비록 기울어진 형태 때문에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지만, 반드시 그것이 아니더라도 예술적 가치는 충분하다. 흰색 대리석으로 빚어낸 8단 케익 같은 모습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피사의 사탑은 가까이에서 봐도 인상적이지만 멀찍이서 바라보는 게 훨씬 더 흥미롭다. 마치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듯 위태로워 보이지만, 이처럼 기울어진 덕분에 갈릴레오의 발견이 있지 않았던가. 갈릴레오는 무거운 물체가 반드시 먼저 떨어지지 않는다는 진자의 법칙 실험을 이 곳에서 시행했다고 한다.재미있는 사실은 사탑이 기울어진 남쪽이나 정반대의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면 똑바로 선 모습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모습만 봐서인지 이런 모습은 대략 낯설다지만, 동시에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사탑 주위를 빙글빙글 배회하다 서서히 발걸음을 바로 옆의 두오모로 향한다. 비록 피사의 사탑 때문에 다른 건물들이 주목받지는 못하지만 캄포 데이 미라콜리 광장에 있는 모든 건축물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예술품’들이다.
흰색 대리석으로 조각된 두오모 역시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작답게 견고하면서도 화사하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4단 구성의 정면이다. 그 화사함과 아름다움은 피렌체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도심 중앙에 있어 주변 건물과 통일감을 부여하는 두오모보다 넓은 광장 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피사 두오모가 더 화려해 보인다. 다만 로마인들은 실용적인 편이라 전후좌우에 동일하게 공을 들이는 그리스 건축과는 달리 앞, 뒤, 옆이 정확하게 드러난다. 피사 두오모도 화사한 정면과는 달리 뒤로 돌아서면 약간은 투박한 모습을 드러낸다.
두오모 앞쪽의 세례당은 양식적인 면에서 두오모, 사탑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때문에 이 세 건물은 지리상으로는 분명하게 분리돼 있지만,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원리대로라면 원주로 된 작은 아케이드 장식과 원형 아치 장식이 중첩적으로 사용된 세례당은 이 세 건물의 정면에 해당된다.
비록 투박한 모습 때문에 관광객들에겐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하지만, 광장 북쪽을 지키고 있는 기다란 모양의 납골당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건축에 쓰인 흙이 팔레스타인의 성지에서 가져왔다는 이 건물은 오히려 단조로워서인지 웅장함과 우아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 중 나의 관심을 끄는 건 납골당 중앙에 놓여 있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 장식이다. 워낙 장식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이 장식만큼은 납골당 전체에 흐르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아니라 아치 중간을 높게 끌어올린 고딕 양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납골당 바로 앞에는 널찍한 잔디밭이 있는데, 마침 햇빛이 따사롭게 내리쬐자 사람들이 하나둘 잔디밭에 눕는다. 나 역시 제법 쌀쌀함을 느끼고 있던 차라 햇볕도 쬘 겸 다리도 쉴 겸 잔디밭에 앉았다. 잔디밭에 앉아 두리번 거리다보니 세례당의 장및빛 지붕과 희색 대리석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인다.
시계를 보니 이제 슬슬 일어설 때가 된 듯 싶어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캄포 데이 미라콜리 외에 피사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 곧바로 피렌체로 돌아설까 하다가 시간도 여유롭고 해서 시내를 걷기로 결심했다. 30여분이면 충분하다니 유유자적 걷다 보면 1시간이면 되지 않겠냐는 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도 없이 감으로만 방향을 찾는 것은 역시 무리다. 결국 시내 구석구석까지 휘저으며 헤매다가 2시간 가까이 지나 기차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덕분에 피사 시가지는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피사는 얼핏 보면 피렌체와 도시 색깔이 비슷하지만, 천천히 시내를 걷다 보면 피렌체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도시 자체가 하나의 고풍스런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피렌체와는 달리 피사는 상당히 오래된 시골 마을을 떠올리게 만든다. 피렌체 시내를 가르며 유유히 흐르는 아르노 강은 이곳 피사까지 이어지는데, 강 주변에 빼곡히 건물들로 채워진 피렌체와는 달리 피사에는 녹지가 많아 한결 시원한 느낌을 자아낸다.
동양인을 무슨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한참을 걷고 걸어 드디어 피렌체 중앙역으로 돌아왔다.
유난히 쓰레기가 많아 별로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이 곳은 우리나라의 조그마한 시골 기차역을 연상시킨다. 이 날은 비가 오려는지 날씨까지 어두워져 기차역 풍경은 한층 더 을씨년스러웠다.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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