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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Italy)

이탈리아 여행 ⑬ 잊을 수 없는 섬과 바다의 기억 ‘카프리’


감을 풀어놓은 듯 은은한 파란 빛 바다 위에 다듬다 만 조각상처럼 솟아 있는 카프리 섬은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방치된 듯 질서 정연하고, 꾸민 듯 수수한 풍경들은 차라리 신비스럽다. 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 황제가 왜 로마를 떠나 이 곳에 은둔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카프리는 이미 2,000여년 전부터 ‘지독히 매력적인’ 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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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리는 이번 이탈리아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다. 그래서인지 아침부터 서두르게 된다. 대충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폴리 중앙역에서 산타루치아 항구행 버스에 오른다. 출근하는 이들로 가득한 만원 버스는 이리 저리 골목을 누비다가 20여분이 지나서야 산타루치아 항구 옆 카스텔 델로보(일명 달걀성) 앞에 내려준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항구는 한산하다. 시간표를 확인하고 가장 빠른 카프리행 하이드로폴리 티켓을 끊는다. 출발 전까지는 아직 20여분이 남았다. 카프리의 살인적인 물가에 대해 수차례 들었던 터라 남은 시간을 이용해 점심에 먹을 빵과 음료를 챙긴다. 오랜만의 페리 여행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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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들뜬 기분은 이내 식고 말았다. 고속의 하이드로폴리는 일반 페리와 달리 운행 중 갑판으로의 진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판 위에서 아름다운 산타루치아 항구와 포근한 지중해를 즐기려던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실내에서 작고 지저분한 유리창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이 페리에 비해 1시간이나 짧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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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씨를 비집고 카프리의 마리나 그란데 항구가 서서히 시야에 들어온다. 산타루치아 항구와는 달리 마리나 그란데 항구에는 제법 관광객들이 운집해 있다. 아마도 나폴리나 소렌토로 돌아가기 위한 관광객들이리라. 내리기 전 다시 한번 일정을 살핀다. 가장 먼저 푸른 동굴을 향하리라는 생각을 재확인하며 카프리에 첫 발을 내딛는다.

마리나 그란데에서 푸른 동굴로 가는 방법은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보트를 이용하는 게 가장 쉽고 빠르지만, 시내를 둘러보며 여유를 즐기기에는 버스가 그만이다. 게다가 1일 패스를 구입하면 버스는, 물론 푸니 콜라레까지 2회 이용할 수 있어 좀 더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당연히 내가 선택한 방법은 1일 패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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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버스 이용객이 많다. 부지런을 떨었지만 어찌나 밀려 있던지, 한 대를 보내고 나서야 다음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무려 20여분 가까이 기다려 올라선 버스임에도 좁고 좁은 운전석 옆 말고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자리가 진짜 명당이다.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 카프리의 아슬아슬한 해안절벽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푸른 동굴행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아나 카프리에 내린다. 버스 하차장과 탑승장이 떨어져 있어, 길을 물어 또 다른 버스 정류장을 찾아나선다. 이런 일들이 불편해서인지 이용객도 거의 없다. 덕분에 이번만큼은 편안하게 앉아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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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를 간다면 반드시 들러야 할 명소라는 푸른 동굴. 아직 해가 중천에 뜨지도 않았건만, 푸른 동굴은 만조로 이미 문을 걸어놓은 상태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곳 저 곳을 둘러보지만 그 흔한 보트 한 척 보이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마저 내린다. 잠시 푸른 동굴 앞 작은 가게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 온 점심을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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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계속해서 변덕이다. 제법 비가 오는가 싶더니 금새 이슬비로 바뀐다. 바람도 제법 불더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짙푸른 지중해를 바라본다. 비록 가고 싶었던 푸른 동굴은 가지 못했어도, 이렇게 근사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

점심을 마치고 나서야 카프리로 다시 돌아왔다. 카프리는 카프리 섬에서 가장 큰 도시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아야 마땅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느 곳을 봐도 아름답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지루해진다는 점에서 그리스 산토리니의 피라와 비슷하다. 결국 피아제타 광장 주변을 서성이다, 푸니 콜라레를 타고 마리나 그란데로 내려오고 말았다.

사실 마리나 그란데 해변가는 해수욕장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저 바닷물에 손을 적실 수 있을 정도의 짧은 공간이다. 카프리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가는 마리나 피콜라다. 카프리의 잘록한 허리선에 위치한 마리나 피콜라는 완만한 해안선 덕에 언제나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굳이 이 곳을 가지 않고 마리나 그란데 해변가로 온 건 잠시 바다 내음만 맡고 솔라로 산을 오르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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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카프리의 귀여운 미니버스를 타고 아나 카프리로 향한다. 아나 카프리는 한적한 시골 마을 같다. 너무 사람이 없어 스산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아나 카프리의 중심가인 비토리아 광장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분위기가 연출된다. 거리는 관광객들로 가득하고, 카페와 기념품 가게도 제법 사람들로 붐빈다. 솔라로 산을 오가는 리프트 정류장은 바로 이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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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로 산행 리프트는 1인용이다. 속도도 느리고 경사도 급하지 않아 무섭지는 않지만, 무려 20여분이나 걸린다는 게 단점이다. 그래도 주위의 그림 같은 풍경 탓에 지루하진 않다.

둥그런 활 모양으로 휘어 있는 마리나 그란데, 팔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있는 이스키아 섬, 어렴풋이 보이는 나폴리 산타루치아 항구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 중 하이라이트는 역시 조가비처럼 새하얀 집들과 푸른 숲, 그리고 새파란 바다가 보여주는 앙상블이다.

밑에서 볼 땐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더니 막상 오르고 보니 해발 859미터가 실감난다. 따뜻한 봄기운을 만끽하며 정신 없이 날아다니는 바닷새와 깎아 자른 듯 가파른 절벽에 잠시 현기증을 느낀다. 시선을 좀 더 멀리 던져본다. 바닷빛이 이토록 맑고 투명할 수 있을까?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데도 새파란 바다 밑 바위들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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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의 조그마한 편의점에서 카푸치노를 한 잔을 사 들고 다시 절벽으로 향한다. 기막힌 풍경과 달콤 쌉싸름한 카푸치노가 어우러져 가슴 벅찬 감동을 만들어낸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행복한 그런 시간이 흐른다.

사람들이 슬슬 내려가기 시작한다. 올라오는 리프트도 거의 비어 있다. 날씨마저 흐려져 이젠 정말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비토리아 광장에 이르니 다시 날씨가 갰다. 이 틈을 타서 시내를 둘러본다. 기념품 가게마다 늘어서 있는 레몬술과 수도사 모양의 자기인형들이 시선을 끈다. 타일로 만들어진 문패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기념품이라도 하나 집어들까 하다가 결국 빈손으로 마리나 그란데로 돌아간다.

산타루치아 항구행 하이드로폴리에 오르자, 이번 여행 내내 누적됐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나도 모르는 사이 스르륵 눈이 감긴다. 이제 돌아간다. 나폴리로, 로마로, 그리고 서울로...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