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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Spain)

스페인 여행 ① 이베리아반도의 시작과 끝 '마드리드'


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유럽의 여느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고풍스러운 건물(혹은 성)들, 그리스의 조각을 닮은 석상들과 넓은 공원, 도시 곳곳에 세워진 기념탑과 개선문 모두 유럽 여느 도시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눈에 띄는 사실은 유난히 분수가 많고, 물이 깨끗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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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에서 만난 한 현지인은 물을 사먹는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물론 스페인 상점에서도 생수는 팔지만, 보통은 도심 곳곳에 있는 분수대(관상용이 아닌 식수용)에서 물을 받아먹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번 스페인 여행 기간동안 적어도 물 값은 아낀 셈이다(대략 500ml 크기의 생수 하나가 1유로 정도 하니까 상당한 절약이 된다).

"그렇다면 겨우 물 말고는 별반 못 것도 없는 마드리드는 건너뛰는 게 낫겠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정열의 나라 스페인에서 가장 정열적인 도시 중 하나가 바로 마드리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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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마드리드는 언제 어디서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젊은이들과 어디서나 토론하는 듯이 쉬지 않고 말을 하는 아줌마들로 가득했다. 간혹 낯설고 시끄럽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스페인"이라는 국가 브랜드가 주는 뜨거우면서도 매우 신선한 체험이었다. 비록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있었을지라도(스페인 사람들은 영어에 서툰 편이다), 마드리드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해서 오히려 조금은 드센듯 느껴지는 빠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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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는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많이 머물렀던 도시다. 스페인 여행을 시작한 첫 이틀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이틀을 합해 꼬박 4일이다. 물론 그 중 하루는 똘레도를 다녀오느라 늦은 밤 샹그리라를 마신 게 전부였으니, 도시를 살펴본 건 만 3일인 셈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무난한 일정이다.

마드리드에 도착한 첫날부터 부지런을 떠느라 여념이 없다. 어서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에 내팽개치듯 짐을 숙소(마요르 광장 근처에 위치했는데, 이 곳은 공사가 한창이었다)에 던져놓고, 곧바로 왕궁부터 찾았다. 왕궁까지 가는 길은 제법 근사하다. 저절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연신 셔터를 눌러대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막상 지도상에 표시된 왕궁은 그냥 주변에 있는 일반 건물들과 별반 달라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베르사유나 버킹엄 만큼은 아니더라도 내심 '궁전이라면'하고 생각하는 기준이 있었는데, 마드리드의 궁전은 그 기준에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줄 선 사람들이 많아 기다리기 귀찮은 이유도 있었지만, 지극히 평범함(솔직히 화려함과는 담을 쌓은 듯한 외관이다)에 실망해 왕궁보다는 마드리드의 활기찬 거리를 즐기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한국으로 출국하기 전에도 분명 시간은 있었지만, 결국 왕궁을 찾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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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바로 옆에 위치한 오리엔트 광장을 지나 스페인 광장으로 향한다. 프랑스 정원처럼 낮고 촘촘한 관목들 사이로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는 연인들과 막 청소를 시작한 관리인들이 보인다. 이렇게 오전 시각이면 의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유로운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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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느라 원래 의도했던 스페인 광장에서 조금 벗어난 곳으로 들어서버렸다. 고대 무덤처럼 생긴 낮은 봉오리와 길고 좁은 인공 분수. 지도를 펼쳐들고 손으로 일일이 짚어 보아도 도저히 어딘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주위에는 관광객조차 없고 그저 자전거를 타고 노는 조그마한 남자 어린이가 전부다. 안내판조차 낯선 나로서는 일단 다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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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지하도를 찾아 돌아가던 중 스페인 광장을 나타내는 이정표를 발견,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각종 책자에 마드리드 여행의 출발지로 많이 소개된 스페인 광장. 적어도 국가명까지 붙였다면 로마의 스페인 광장보다 훨씬 크게 화려하리라. 하지만 결과는 조금 의외였다.
 
광장이라기 보다는 그냥 작은 놀이터 같은 느낌에, 조금은 몸을 사리게 만들 정도로 많은 노숙자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개중 몇몇은 마치 '아니 아침부터 이게 왠 횡재냐'는 표정이다. 이때 문득 머리를 스치는 건, 스페인의 악명높은 소매치기. 견물생심이라고 굳이 이들에게 일부러 표적이 될 필요는 없다.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 동상(이 곳에는 마침 서너명의 관광객들이 있었다)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우스꽝스런 동작으로 낯선 나까지도 웃게 만드는 이들을 살펴보다가 시선을 끄는 장소를 찾았다. 그랑비아를 향해 위치한 스페인 광장 앞 분수는 그다지 작지도, 감당못할 만큼 크지도 않아 잠시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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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아예 작정을 하고 걷기 시작했다. 10회권 교통티켓을 끊었기 때문에 그냥 버스를 타도 됐지만, 무작정 버스에 몸을 싣는 것보다는 걸으면서 사람들과 부딪히는 게 좀 더 즐거운 경험이다. 그러면서도 버스 노선을 메모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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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걷다가 도착한 곳이 레띠로 공원이다. 레띠로 공원은 기대 이상으로 넓고 멋졌다. 어느 누구도 서로에게 방해주지 않으려는 듯이 여유 있게 자연을 즐기고 있었고, 여기 저기 지나칠 정도로 자극적인 스킨쉽을 즐기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밤이 되면 기가 막힌 장면들이 많다고 한다. 물론 직접 확인은 못했지만. 특히 레띠로 공원은 그 다음날에도 다시 들렀다. 당시에는 이 곳에서 무료 연주회가 열렸었는데, 일요일 오전임에도 많은 인파로 빈 의자를 찾기조차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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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호수를 끼고 있어 더욱 아름다운 레띠로 공원을 나와 동쪽으로 걷다보니 프라도 박물관이 보인다. 시간은 5시 30분경. 벌써 폐장시간이 가까워, 프라도 박물관을 포기하고 대신 바로 밑에 있는 보타니코 정원으로 향했다.

공원이 유료라. 적어도 유료라면 식물원 수준은 되겠지 싶어 안으로 들어선다. 멋지다. 하지만 굳이 이 곳에 돈을 쓸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레띠로에서 자연을 즐기는 이들을 관찰하는 게 더 낫다. 물론 수목이나 화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얘기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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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걷겠다고 마음 먹은 마지막 장소, 아또차 역에 도착했다. 아또차 역은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멋졌고, 훨씬 넓었다. 주위에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그 동안 듬성 듬성했던 도시가 마치 여기부터는 공간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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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또차 역 내부는 마치 식물원 같다. 기차역 답게 채광창이 환하게 뚫려 있는데, 그 곳 바로 아래 나무와 화초들이 쉼터를 제공한다. 이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데, 솔직히 분위기는 왠만한 공원보다 낫다. 비록 여기저기 대놓고 애정공세를 하는 친구들 때문에 잠깐 쉬었다 가기는 민망하지만, 애인과 같이 간다면 분명 만족스러울 것이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도저히 더는 걷기조차 힘들다. 결국 선택한 방법은 드디어 버스를 타는 일이다. 괜한 모험보다는 조금은 안전하게 시내 곳곳을 도는 (C라는 알파벳이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는) 순환버스를 선택했다. 이미 하루종일 걸었던 터라 길거리 풍경이 익숙하다. 덕분에 막 지려는 석양만큼이나 마음이 여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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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분명 책자에서 얼핏 본 것 같은 건물이 저 멀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대체 저기가 어디지? 다시 무작정 내렸다. 근위병들이 지키는 걸 보니까 무슨 군사시설 아니면, 굉장히 중요한 장소겠군이라는 생각을 하며 열심히 걸었다. 솔직히 내가 본 곳은 너무 높은 곳에 있어 걷는데 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도착한 곳. 그곳은 다름 아닌 내가 맨 처음 갔던 왕궁 옆 대성당이었다. 솔직히 낮에 봤을 때에는 이런 곳인 줄 몰랐는데, 지금에서야 이 곳이 이렇게 멋지다는 생각을 하게 되다니. 그래서 낮에는 그냥 지나쳐 버렸던 이 곳을 들어가 봤다. 성당 안 풍경도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웅장함과 화려함을 둘째 치고, 경건함마저 감돌았다. 출국 전 다시 들렀을 때에도 그 감동은 여전히 건재했다.

이렇게 마드리드의 하루는 제법 바쁘면서도 여유롭게 저물었다. 그 다음날은 프라도 박물관과 소피아 왕비 미술센터에서 보내느라 시내를 다시 한번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스페인 여행 끝자락에 머물던 이틀 동안에도 새로운 볼거리를 찾아 여행 책자를 뒤적이기보다는 그저 마드리드의 따뜻한 풍경과 아름다운 사람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정겨운 도시 내음을 만끽하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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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마드리드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인상적인 건물이나 회화 작품보다 따뜻하고 정겨운 사람들과 풍경들이다. 말한마디 통하지 않는데도 열심히 웃으면서 길을 알려주던 사람들, 영어 한마디 적혀 있지 않은 메뉴판을 보며 난감해 하는 내게 '오늘의 요리'를 추천해 주던 친절한 웨이터(당시 오늘의 요리는 '구운닭요리'), 성당 안에서 셔터를 눌러대는 내게 미소를 보내주던 나이든 수녀님, 그리고 스페인의 정렬만큼이나 강렬했던 석양. 어느 것 하나를 빼놓고선 마드리드를 얘기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마도 이러한 기억 때문에 난 언제나 마드리드는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도시, 아니 찾지 않고서는 스페인을 논하기 어려운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라고 말한다. 만약 마드리드를 그저 "스페인의 수도" 혹은 "레알마드리드의 고향" 정도로 여긴다면 꼭 한번 직접 찾아가보길 권한다. 단언컨대 그 생각은 바뀔 것이다.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