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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Spain)

스페인 여행 ⑥ 스페인의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발렌시아'


드리드로 돌아가기 전에 한 군데 정도 더 들러도 좋을 시간이 남았다. 스페인 지도를 펴고 그라나다 인근 도시들을 훑어본다. 천애의 휴양지로 각광받는 말라가(Malaga)나 스페인 내에서 가장 훌륭한 플라멩코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세비야(Sevilla) 정도가 위치상으로 가장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는 발렌시아(Valencia)라는 도시로 결정됐다. 이유는 단 하나, 당장 출발할 열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특별한 목적 없이 찾은 발렌시아는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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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하루가 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발렌시아 탐험은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조차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됐다. 이 시각에 문을 열만한 곳은 성당 정도가 아닐까? 지도를 펼쳐 근처의 성당들의 위치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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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로크의 '향연'

기차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발렌시아 대성당이다. 멀지 않은 곳이라 느긋한 마음으로 대성당을 향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둑했던 시내가 어느새 잠에서 깨어났다. 첫 차처럼 보이는 버스가 겨우 서너명만을 태운 채 스쳐 지나간다. 빵 냄새 가득한 베이커리에서는 이제 막 의자를 노천으로 꺼내 놓는 중이다. 거리 곳곳의 바로크풍 건물들은 황금빛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입체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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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여유로운 아침을 맞는 게 얼마만인가?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어 천천히 시내를 걸어본다. 순간 어디선가 귀를 자극하는 강렬한 액센트가 들려온다. 독일어다. 저 멀리 단체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이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지도를 펴고 위치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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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도자기 박물관’, 지도에 표기된 대로라면 “매력적인 정문”이 인상적인 곳이다. 이 표현은 정말 맞는 말이다. 성모와 아기 예수를 둘러싼 천사들과, 그들의 발 밑에서 고민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새겨진 정문은 “매력적”이었다. 다만 건물 전체와는 동떨어진 모습이어서 조금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문을 열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만큼, 원래 계획대로 발렌시아 대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드리드, 톨레도, 바르셀로나, 그리고 그라나다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성당은 부지기수로 들렀던 만큼 특별한 기대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렌시아 대성당은 구도나 표현법이 조금은 남다르다. 르네상스 양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으면서 느낌은 좀 더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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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성당 좌측에 위치한 미겔레테 탑이 눈길을 끈다. 성당 본관과는 달리 밋밋한 벽돌에, 장식이라고는 꼭데기 층에 겨우 새겨진 도형이 전부인 이 건물은 외관상으로는 전혀 특별한 게 없다. 그러나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이 탑의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여타 르네상스 양식의 종탑들이 본관과 분리된 채 독립된 공간으로 건축된 반면, 이 종탑은 본관과 연결돼 있다는 점부터가 독특하다. 또 일반적으로 본관과 연결하여 지을 경우 좌우 대칭형 구조로 안정감을 노리는데, 이 종탑은 한쪽에만 세워져 극적 긴장감을 자아낸다. 특히 일부러 정문 입구보다 조금 앞당겨 세움으로써 성당 정면의 입체감이 극대화돼 보인다.

건축물에 응용된 도형들이 매우 다양한 것도 발렌시아 대성당의 특징이다. 유럽 건축물의 가장 기본형인 돔과 직사각형은 물론이고, 정사각형, 6각형, 8각형, 그리고 반원과 사다리꼴에 이르기까지 마치 레고 조각을 이리저리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이러한 건물과 건물들 사이에는 과거에 통로로 사용됐음직한 구름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개중에는 새롭게 단장된 현대식 건물과 연결된 경우도 있어 시선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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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는 외관에 비하면 평범하다. 중앙을 따라 기다랗게 걸쳐 있는 리브볼트와 화려하게 장식된 장미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여러 성당 건물들에서도 반복적으로 보여지던 것들이다. 이제 내 관심은 온통 종탑에 오르는 데에 집중돼 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는 언제나 훌륭한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오전 9시에 개방하는 것으로 돼 있으니 아직 20여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잠시 밖에 나가서 차라도 한잔 할까 하다가, 그냥 조용히 기도하는 이들 사이에서 쉬기로 한다. 정각 9시, 관리인이 정확하게 매표소에 나타난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는 사람이 없었는지, 그는 나를 보며 활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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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70미터 밖에 안되는 미겔레테 탑이지만, 정상에서 바라본 발렌시아는 제법 근사했다. 지나치게 고풍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서울처럼 너무 현대적이지도 않다. 좀 더 높은 곳이었다면 바다가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관광객 무리에 치이지 않고 편안하게 시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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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나마 아침을 먹을 양으로 대성당 앞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는다. 스크램블 에그와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지도를 살핀다. 이 때 옆을 스쳐지나가는 2층 개방형 버스, 바로 사이트싱 버스(sightseeing bus)다. 사실 어디를 가볼까 싶은 마당에 사이트싱 버스는 반갑기까지 했다. 망설임 없이 서둘러 아침을 마치고 버스에 오른다.

발렌시아 대성당 앞에서 출발한 사이트싱 버스는 중앙시장, 교역소, 콰르트 타워, 시청, 주 극장, M. 도스 아구아스(Dos Aguas) 궁전, 라드로(Lladro) 쇼핑가, 토로스 광장, 발렌시아 북부 기차역, 법원, 음악의 전당,  기술 및 과학의 도시(City of Arts and Sciences), 성 피오(Pio) 5세 궁전, 로스 세라노스(Los Serranos) 타워, 대사원의 경로로 이동했다.

구시가처럼 오래된 건물들이 위엄을 자랑하고 있는 도심 한 가운데를 출발해 현대식 미술관이나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 서쪽을 지나, 미래형 건물로 채워져 있는 동쪽을 거쳐 다시 도심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얼추 갈만한 장소를 이미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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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목적지는 교역소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곳은 건물 상단의 독특한 고딕 양식이 가장 먼저 시선을 끈다. 그러나 더욱 인상적인 건 내부 장식이다.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원주와 천장을 가득 채운 교차 볼트가 벽돌 문양과 어울려 매우 이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교역소는 예전부터 이곳을 드나드는 많은 상인들이 재정을 부담해 해상 무역 영사관으로 썼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은 중앙시장 사람들의 회의장소로 활용되고 있다고 하는데, 내가 찾은 날에는 단체 관광객들이 의자를 끌어 놓고 빙 둘러 앉아 이 시설의 역사와 배경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 곳에서 서쪽의 현대 미술관까지는 제법 걸어야 한다. 잠시 고민하다 부족한 시간을 원망하며 결국 미술관을 포기한 채, 교역소 옆의 중앙시장(Mercado Central)으로 향했다. 외관만 봐서는 무슨 박물관이 아닐까 싶지만 이 곳은 발렌시아 시민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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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는 갖가지 종류의 먹거리가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모양으로 절단해 놓은 돼지고기, 하몽하몽이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는 돼지 다리만 잘라 따로 판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정육점 어딜 가나 살아 있는 돼지가 연상될 정도로 실감나는 하몽하몽이 잔뜩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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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싱한 과일 몇 개를 집어들고 발렌시아 시내를 관통하는 투리아(Turia) 강으로 향한다. 과거 지진으로 이 도시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에도 묵묵하게 견뎌냈던 콰르트 타워와 쇼핑가를 지나 어느덧 버스는 강가에 이른다.

◆ 발렌시아의 미래 '과학과 예술의 도시'

첫 번째 버스를 탔을 때 눈여겨 봐둔 칼라트라바 다리 앞에 선다. Peineta(스페인의 전형적인 장식용 빗)이라는 호칭에 어울리게 나선형 빗을 닮은 이 다리는 발렌시아의 축제 때 불꽃놀이를 보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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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트라바  다리 위에서 투리아 강을 바라본다. 사실 투리아 강은 강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조그마한 하천이다. 다만 크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주변으로 매우 근사한 공원이 조성돼 있어, 한가롭게 산책하기에 그만인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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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따라 미래형 건물들이 몰려 있는 도시 남쪽으로 걷는다. 때마침 시원한 분수쇼가 펼쳐지는 음악의 전당을 지나, 비스듬히 기울어진 가로등 산책로를 따라 미래 지구에서도 가장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는 기술 및 과학의 도시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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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섯개의 건물들이 옥빛 물길을 사이에 두고 기다랗게 이어져 있는 이 지역은 아직 공사가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탄성을 자아낸다. 지금껏 이런 모습의 건물들을 본 적이 없다. 마치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수영하는 듯 해자 한 가운데 세워진 건물도 있고, 이중 삼중의 천장을 얹은 원형 건물도 있다. 건물을 따라 걷다 보니 정말이지 미래 도시에 왔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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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시간이 다가와 서둘러 발렌시아 기차역으로 향하면서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짧은 일정과 부족한 정보 탓에 바다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언젠가 토마토 축제가 열릴 때 다시 들르리라 생각하며 아쉽지만 마드리드행 기차에 오른다.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