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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South Africa)

남아공 여행 ④ 더반에 새겨진 마하트마 간디의 인생과 철학



시사철 온화한 날씨, 아름다운 해변, 서핑을 위한 완벽한 파도¼ 이러한 천애의 자연 환경 외에 더반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20세기의 마지막 성인으로 추앙 받는 ‘마하트마 간디(Mohandas Gandhi)’, 그가 바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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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의 잇따른 변호사 사업 실패 이후, 1년간 세스 다다 압둘라(Seth Dada Abdullah)의 소송 사건을 돕기 위해 그가 이 곳 더반으로 건너온 것은 1893년. 당시 더반은 1860년대부터 사탕수수 수확을 위해 유입된 인도인 노예 정착민들과 함께, 인도 본토에서 건너온 자유 인도인들이 한 데 어우러져 커다란 인도인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었다.

워낙 인종차별이 보편화돼 있던 시기라, 반 인도인 정서가 높아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1등석 기차칸에서 쫓겨난 간디에게는 이와 같은 ‘차별대우’가 용인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 후 1914년 인도로 떠날 때까지 무려 20여년에 걸쳐 남아공에 거주하는 인도인의 권익을 대변하며, 아시아인 등록법(Asiatic Registration Act), 힌두인과 무슬림간 결혼 무효 판결 등 여러 가지 ‘차별’에 앞장서서 반대하는 한편, 비폭력, 불복종, 비협력으로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사티어그라하(satyagraha) 철학을 고안하게 된다.

◆ 간디 정치 운동의 본거지 ‘피닉스 공동거주지’

더반에서 간디가 거주했던 곳은 더반 시내에서 약 25km 가량 떨어진 피닉스 공동거주지(the Phoenix Settlement). 이 곳에서 그는 남아공에 거주하는 인도인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2개의 정치 기구, 나탈인도회의(Natal Indian Congress)와 트랜스발 기반 영국인도연합(Transvaal-based British Indian Association)을 창립했으며, 그의 사티어그라하 철학을 설파하기 위해 4개국어로 주간지 ‘인디언 오피니언(Indian Opinion)’을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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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피닉스 공동거주지는 1985년의 ‘아이낸더 폭동(Inanda Riots)’으로 인해 수많은 건물들이 파괴됐지만, 그 후 지속적인 복구작업을 거쳐 지난 2000년에 간디가 머물던 집을 포함해 일부 시설물이 복원됐다. 간디가 머물던 하얀색 1층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중이다. 나지막한 언덕을 올라 포티코(portico; 콜로네이드가 있는 현관)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서면, 바깥과 마찬가지로 하얀 색 방이 나타난다. 뭔가 대단한 걸 기대했다면 아마도 실망이 클텐데, 총 3개의 방 안에는 조그마한 그의 흰 색 동상과 벽면을 채우고 있는 사진들과 글들이 전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 역시 검소한 그의 집과 마찬가지로 단출하기 그지 없다. 그래도 그는 이 곳에서 진실과 정의를 위해 매일 같이 사람들과 토론하고, 고민했으리라.

◆ 간디의 후예들의 고향 ‘닥터 유수프 다두 스트릿’

간디의 발자취를 찾아 피닉스 공동거주지까지 찾아갈 시간이 없다면, 더반 시내의 인도인 거주지(Indian Quarter)와 한 때 간디의 사무실과 집이 있었던 닥터 유수프 다두 스트릿(Dr Yusuf Dadoo Street)-지난 2008년에 그레이 스트릿(Grey Street)에서 이름이 변경됨-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비록 직접적인 유적지를 찾을 순 없지만, 이 곳들을 둘러보다 보면 인도인 특유의 가난해도 낙천적인 분위기 속에서 간디의 ‘무소유’, ‘무집착’ 정신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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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어(Berea) 기차역에서 동쪽으로 약 5분 거리에 위치한 닥터 유수프 다두 스트릿은 남북으로 뻗어 있는 약 1km의 직선형 도로다. 이 곳에 대한 아무 정보가 없이 방문한 사람일지라도, 이 곳이 분명 다르다는 걸 느끼는 데에는 몇 초 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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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은 동양 느낌 물씬 풍기는 지붕을 이고 있는 빅토리아 스트릿 마켓(The Victoria Street Market)-현지인들은 보통 빅(Vic)으로 부름. 약 170여개의 점포가 입주해 있다는 이 곳에는 인도의 전통의상인 사리(Saree)를 비롯해, 가방, 장신구, 그리고 골동품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 건너온 듯한 물품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곳이 인근 다른 시장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아름다운 색깔만큼이나 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각종 향신료들 때문일 것이다. 매콤하면서도 톡 쏘는 느낌의 마살라(massala) 향은 어쩌면 인도인들이 이 곳 더반에서 100년 넘게 인종차별의 핍박을 이겨내며 지켜온 그들만의 정체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이슬람, 기독교를 포용한 더반 인도인 공동체

사실 닥터 유수프 다두 스트릿에는 오직 인도 문화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힌두교인이요, 이슬람교인요, 기독교인이다”라며, 내 종교를 존중하는 것과 똑같이 남의 종교도 존중하라고 가르치던 간디의 정신을 몸소 실천이라도 하듯, 겨우 1km밖에 되지 않는 이 짧은 도로에는 이슬람, 기독교 문화가 인도인의 힌두 문화와 절묘하게 뒤섞여 있다.

빅토리아 스트릿 마켓과 함께 닥터 유수프 다두 스트릿의 상징물로 간주되는 마드레사 아케이드(Madressa Arcade)와 주마 이슬람사원(Juma Mosque)이 대표적이다. 좁고 기다란 보행자 통로에 여러 개의 열주를 나열해 만든 콜로네이드(인도)와 기다란 타원형 모양의 돔(이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기대 이상의 조화를 보여준다. 이런 건축적 통합은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쳐, 마드레사 아케이드 1층 상점가에는 사리와 부르카(burka) 매장이 나란히 위치한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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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레사 아케이드 서쪽으로 도보 1분 거리에 있는 엠마누엘 대성당(Emmanuel Cathedral) 역시 ‘다문화 복합 공간’인 닥터 유수프 다두 스트릿의 상징으로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다. 영국식 후기 고딕 양식의 외관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공수해온 건축자재만 본다면 영락 없는 유럽형 성당에 지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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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건물 중앙에 우뚝 솟은 첨탑은 어딘지 모르게 이슬람 사원의 미나렛(minaret)을 연상시킨다. 이 성당은 역사적 측면에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인권운동의 대부’ 데니스 헐리(Denis Hurley) 대주교는 남아공 정부의 인종분리정책 폐지와 빈민구제를 위해 이 곳에서 60평생을 바쳤다.

이 밖에 닥터 유수프 다두 스트릿에서 간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장소는 프린스 에드워드 스트릿(Prince Edward Street)에 위치한 나탈인도회의 빌딩-간디가 나탈인도회의 대신 구입함-과 마드레사 아케이드 옆의 의사당(Congress Hall)-간디가 직접 구입해 나탈인도회의와의 회의 장소로 사용함-이 있지만, 전자는 주차장으로, 후자는 사무실 건물로 현재 사용 중이어서 굳이 지도를 짚어가며 찾아볼 필요까지는 없다. 그보다는 마드레사 앞 커머셜 로드(Commercial Rd)를 따라 동쪽으로 걸어서 더반 시청을 보는 편이 낫다.

더반 시청은 그 외관만 놓고 본다면 아마도 더반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 아닌가 싶다. 건축가 스탠리 허드슨(Stanley G. Hudson)에 의해 1910년 설계된 네오바로크 양식의 이 건축물은 사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시청에서 영감 받아 거의 복제한 수준이라고 한다. 비록 독창성만 놓고 본다면 대량 생산된 컨테이너 박스와 전혀 다를 바 없지만, 아무 특색 없는 주위 건물들 탓에 돋보이는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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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 2차 대전 전사자 기념비가 놓여 있는 프란시스 페어웰 광장(Francis Farewell Square)을 지나 웨스트 스트릿(West Street)을 건너면 메드우드 정원(Medwood Gardens)에 도착하는데, 이 곳에는 조금은 조잡한 느낌의 물건들을 파는 벼룩 시장이 선다. 동쪽으로 계속 걷다 보면 워크샵과 센트럴 파크(Central Park)에 다다른다. 내가 이 곳을 찾았던 때는 일요일, 사실 이렇게 시내에 혼자 가서는 안 되는 때였다. 역시 예상대로 내가 나타나자, 정원에서 쉬고 있던 일부 부랑자들이 거의 뛰듯이 달려온다. 다행히 인근건물 경비원의 도움으로 위험을 모면했지만,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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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위험한 상황이 싫다면 아름다운 골든 마일 해변가에 계속 머물거나, 안전한 그레이빌(Greyville)이나 버리어 지역을 산책하는 게 좋다. 그 중 버리어 지역의 보타닉 가든(Botanic Garden)은 추천할 만하다. 여타 보타닉 가든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꽃과 나무들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조그마한 호숫가에서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새들을 관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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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에 따르면 이 곳에만 무려 130여종의 새가 서식한다니, 이건 보타닉 가든이 아니라 조류 서식지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이 곳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 나온 백인 중산층 가족들이 많아, 더반 도심과는 달리 유럽에 온 느낌마저 든다. 덕분에 소매치기 걱정 없이 잔디밭에 앉아 간디의 인생과 철학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본다.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