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6월 16일 오전 10시 30분, 흑인밀집구역 소웨토(Soweto)의 중등교육부터 영어가 아닌 아프리칸어(Afrikaans)로 진행키로 결정한 것에 대한 반발해, 수천명의 학생들이 백인들과 동등한 교육권을 주장하며 시위행렬을 위해 올란도 웨스트(Olando West)에 모여든다. 지금껏 이 정도 규모의 시위행렬을 경험하지 못한 지역경찰은 결국 발포를 통한 시위해산을 시도하고, 그 결과 13살 소년 헥터 피터슨(Hector Pieterson)이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한다. 이 소식을 접한 흑인들은 남아공 전역에서 반정부 시위를 펼치고, 그 결과 600여명에 달하는 사상사가 추가로 발생한다. 이것이 남아공 인종분리정책(Apartheid) 폐지의 발단이 된 ‘소웨토 봉기(Sweto uprising)’ 사건의 전말이다.
◆ 강제이주®통행금지®거주지제한®보호관찰®봉기
하지만 소웨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웨토 봉기 이전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소웨토의 기원은 남아공정부가 1904년 요하네스버그 쿨리타운스(Coolietowns)에 거주중인 유색인종을 도심으로부터 남서부 20km에 위치한 클립스프룻(Klipspruit)으로 강제 이동시킨 데서 비롯된다. 대외적인 이유는 도심빈민층의 주거환경 개선이었지만, 브이자(V)처럼 움푹 파인 지형에다, 하수도시스템으로부터 겨우 3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클립스프룻은 결코 도심빈민가보다 낫지 않았다. 사실 남아공정부의 진짜 속셈은 골드러시로 인해 요하네스버그로 유입된 백인들에게 주택부지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남아공정부의 인종차별은 1948년 인종분리정책이 법제화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변한다. 이미 인구과밀과 부족한 사회기반시설로 신음하고 있던 소웨토에는 계속해서 흑인들의 강제이주가 진행됐다. 게다가 통행금지법, 거주지제한법, 보호관찰법 등 인종차별적 정책들이 추가로 입안 되면서, 이미 훌쩍 성장해버린 소웨토 2세대 주민들마저 그 곳을 떠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한 문제들은 1960년 범아프리카회의(PAC; Pan African Congress) 주도의 통행법(Pass law) 반대운동이 69명의 사상자로 이어진-대부분 등에 총상을 맞은 것으로 확인돼 더욱 충격적이었던-샤프빌 학살(Sharpeville Massacre)로 인해 국제문제화 되지만, 진정한 변화는 1976년 ‘소웨토 봉기’가 발발하고 나서야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 소웨토 속의 또 다른 차별 ‘난민촌’
1992년 인종분리정책 폐지 이후, 남아공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웨토는 여전히 흑인들의 주거지이자, 빈민촌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소웨토를 도보 여행으로, 그것도 혼자 다녀오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하루 투어(one day tour)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투어는 소웨토의 4대 명소인 만델라 가족 박물관(Mandela Family Museum),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의 집(The home of Archbishop Desmond Tutu), 헥터 피터슨 박물관(Hector Pietoerson Museum), 그리고 리자이나 먼디 성당(Regina Mundi Church)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므로, 경력이 풍부한 가이드를 선택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내가 선택한 가이드는 무려 10년여간 소웨토 투어를 인솔해 온 코파노(Kopano), 브라운 슈거 백패커스의 지정 가이드다. 그가 처음으로 안내한 곳은 소웨토 외곽의 피난민 집단 거주지다. 정치, 경제적 불안을 피해 이 곳까지 유입된 이들은 남아공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짐바브웨와 모잠비크는 물론, 말라위와 소말리아에서 건너온 이들도 적지 않다. 이 곳 가이드는 짐바브웨 출신 난민촌 거주자가 맡았다. 그에 따르면 이곳 난민촌 생활도 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매일같이 굶주림, 질병과 싸우다 보니, 위생이나 교육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를 따라 둘러본 집들은 판자집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각목을 세워 기둥을 만들고, 양철판으로 벽을, 합판으로 지붕을 덮은 게 전부다. 바닥은 질퍽한 흙 그대로이고, 겨우 서너평 남짓한 실내에는 못쓰는 나무 조각들을 엮어 만든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나를 경악케 만든 건 바닥 한 구석에 파놓은 물구덩이에 고여있는 흙탕물로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었다. 새파랗게 질려 있는 나를 바라보며 ‘photo’를 외치는 그들에게 카메라 플래시 대신 약간의 팁을 내밀자, 가이드가 사진을 찍고 돈을 주는 게 그들에 대한 예의라고 설명한다. 결국 한 컷을 사진을 찍고 ‘집’을 나선다. 가이드는 난민촌 내의 유일한 학교와 공중수도를 추가로 보여줬지만, 이 곳을 ‘구경 왔다’는 죄책감에 도중에 포기하고 만다. 겨우 몇십분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그 충격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여전히 굳은 표정의 나를 보며, 코파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을 건넨다. “그게 인생이잖아!(C'est la vie!)” 그래, 그게 그들에겐 조금 굴곡진 인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웃어넘겨버리기엔 그들의 삶이 너무 비참하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내게 그는 다짜고짜 다음 행선지에 대해 설명한다. 지금 향하는 곳은 소웨토의 랜드마크(landmark) 가운데 하나인 ‘올란도 발전소의 쌍둥이 냉각타워(two cooling towers of the Orlando Power Station)’. 현재는 가동을 중단하고 대규모 개발을 기다리는 중이라 내부를 둘러볼 수는 없었지만, 타워 외부의 화려한 그래피티를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블랙 마돈나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넬슨 만델라의 초상이 눈길을 끈다.
◆ 평화의 수호자 ‘넬슨 말델라’와 ‘데스몬드 투투’
약 5분 후 널찍한 도로로 접어든 코파노는 사람들로 붐비는 성냥갑 모양의 붉은 벽돌집 앞에 차를 세운다. 이 곳이 바로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전 남아공대통령이 그의 첫번째 부인 이블린(Evelyn)과 거주했던 집을 개조해 만든 ‘만델라 가족 박물관’이다. 실내에는 1990년 5월 11일 감옥에서 석방된 만델라 전 대통령이 그의 두 번째 부인 위니(Winnie) 여사와 함께 손을 흔드는 유명한 사진을 비롯해, 그의 가족들의 추억이 깃든 그림들과 사진들로 가득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무려 5체급을 석권한 바 있는 80년대의 전설적인 권투선수 ‘슈거 레이 레너드(Sugar Ray Leonard)의 복싱벨트와 만델라 전 대통령이 신었던 낡은 부츠들, 그리고 전세계 대학들로부터 받은 명예박사학위들이다.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의 집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아, 그 유명한 빌라카지(Vilakazi) 도로-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두 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한 지역-를 지나 곧장 헥터 피터슨 박물관으로 향한다. 박물관 앞에는 소웨토 봉기의 아이콘이 돼 버린 샘 은지마(Sam Nzima)의 사진과 함께 헥터의 시신을 들고 있는 음부이사(Mbuyisa) 어머니의 글이 새겨져 있다.
◆ 소웨토 봉기의 역사적 현장들
“음부이사는 나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웅이 아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헥터를 드는 것이 결코 영웅주의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형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만약 내 아들이 죽은 헥터를 그대로 두어서 누군가 그 시체를 뛰어넘는 것을 본다면, 그는 결코 이 곳에 살 수 없을 것이다.”
박물관 유리문을 들어서는 순간, 다시 한번 가슴 찡한 장면을 목격한다. 소웨토 봉기 때 총에 맞아 숨진 어린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들이 실내 조그마한 정원-이 곳은 실제 이 어린이들이 죽은 자리라고 한다-에 빼곡히 세워져 있다. 비록 모든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볼 수는 없지만, 마음속으로나마 그들의 명복을 빌어본다. 이 밖에 박물관에는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과 소웨토 봉기를 설명하는 문서, 사진, 비디오 영상물로 가득하다.
투어의 마지막은 행선지는 리자이너 먼디 성당-라틴어로, 원래의 뜻은 세상의 여왕(Queen of the World)이다. 이 곳 역시 소웨토 봉기의 역사적 현장이다. 피 흘리는 학생들이 총격을 피해 달려온 이 곳도 결코 피난처가 될 수 없었다. 이미 극도로 흥분한 경찰들은 최루가스는 물론이고, 성당 내부로 들어와 총격을 가한다. 그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게 되고, 예수상마저 한쪽 팔을 잃고 만다. 이러한 총탄자국은 지금도 건물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코파노는 이 성당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소웨토 주민들의 정신적 안식처이자, 정치 토론장이라고 설명한다. “이 곳은 그냥 성당이 아닙니다. 이 곳은 우리들의 성당이고, 이 나라의 성당입니다. 이름이 괜히 세상의 여왕이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이 성당의 유명한 작품인 로렌스 스컬리(Laurence Scully)의 ‘블랙 마돈나와 소웨토의 어린이(the Black Madonna and Child of Soweto)’로 안내한다. 이 인상적인 그림 아래에는 ‘소웨토의 눈(the eye of Soweto)로 불리는 커다란 눈이 우리를 응시한다.
이것으로 소웨토 하루 투어가 마감된다. 수십년의 남아공 역사 공부를 겨우 6~7시간만에 마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도 마음 한 편으로는 뿌듯함이 남는다. 이게 바로 관광과 여행의 차이가 아닐까?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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