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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Italy)

이탈리아 여행 ⑫ ‘살레르노’에서 길을 잃다


행을 다니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에 맞닥뜨릴 때가 있다. 보통은 임기응변으로 적절히 대응하는 편이지만, 가끔은 무척 당황해 갈팡질팡할 때도 있다. 살레르노는 내게 있어 후자에 가까웠던 도시다.

살레르노로 향하게 된 건 순전히 나폴리로 가기 위한 경유 목적이었다. 아말피에서 나폴리로 가는 방법은 소렌토로 되돌아가는 방법과 살레르노를 거쳐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소렌토로 돌아가는 방법은 SITA 버스를 타고 거쳐왔던 도시들을 다시 되짚어 가는 것이라 시간도 많이 걸릴 뿐더러 좌석 구하기도 쉽지 않다. 반면 살레르노로 가는 길은 시간도 40여분 정도 단축할 수 있고, SITA 버스 말고도 나폴리행 기차편도 있어 잘 하면 남는 시간동안 잠시 시내를 둘러볼 수도 있다.

이것만으로도 살레르노로 향할 이유는 충분했지만, 결정타는 살레르노 보나디스산 정상에 있다는 아레치 성이다. 아말피에서 만난 여행객들에 의하면, 아레치 성은 살레르노 해안가에 설립된 여타 성들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이 성에는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전시관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이 곳에서 바라보는 살레르노의 전경은 기막히다는 게 그들의 총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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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의 망설임 없이 살레르노행 SITA 버스에 오른다. 아직 나폴리행 막차를 타기에는 제법 시간적 여유가 있다. 어두워졌던 하늘도 다시 개는 듯 싶어 기분까지 좋아진다. 그래도 조심할 양으로 앞 자리에 앉은 현지인에게 살레르노에 도착하면 꼭 알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영어에 서투른 모양이지만 살레르노는 알아들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15분쯤 지났을까? 멋진 해안선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동안 믿었던 현지인이 그만 내리고 만다. 당황해 아무말도 못하고 있던 차에 이번엔 좀 더 젊은 현지 여학생이 앞자리에 앉는다. 그녀에게 다시 부탁한다. 살레르노에 도착하거든 알려달라고.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대신 바디랭귀지로 알겠다는 의사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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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즐거운 여행길이 시작된다. 아찔한 절벽을 지나고, 구불구불한 고가를 지나 완만한 해안도로에 접어든다. 우측으로 컨테이터 박스가 가득한 살레르노 컨테이너 터미널(SCT)이 보인다. ‘한진해운’이라는 한국어가 적힌 컨테이너도 있다. 얼굴 가득 미소가 퍼지는 순간 앞자리에 앉았던 여학생이 고개를 돌려 ‘이 곳에서 내려야 할 것 같다’고 손짓을 한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버스에서 내린다.

조용하다. 관광객은 고사하고 현지인도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내린 것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만 아무래도 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침착하게 다음 버스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써먹을 수 없었다. 1시간 가까이 주위를 서성였지만 버스 한 대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날씨가 어두워지더니 이제 비까지 내린다. 시계를 보니 7시를 넘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길거리에서 노숙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바짝 든다. 앞뒤 안가리고 일단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간다. 어두운 가게 안에는 젊은 현지인 청년이 앉아 있다. 매우 놀란 눈치다. 그에게 다짜고짜 택시를 불러달라고 말한다.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듯한 그 청년은 뭐라고 열심히 말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겠다. ‘Taxi’와 ‘Salerno’를 열심히 외쳐보지만 손을 휘저으며 아니라는 표시를 한다. 이번엔 전략을 바꿔 ‘Napoli’와 ‘Amalfi’를 말한다. 하지만 이게 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 모양이다.

그가 되묻는다.

“Salerono? Amalfi?”.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말한다.

“I have to go to Naples. I think Salerno bus stop is closer than Amalfi from here. Please, call any taxi.”.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결국 그가 알아들은 모양이다. ‘OK’를 연발하더니 내 어깨를 두드리며 밖으로 안내한다. 그리고선 가게 문을 닫는다.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한 내게 일본인인지를 묻는다. 한국인이라는 대답에 그는 자신의 차가 일본 차라는 대답과 함께 자신이 직접 데려다 주겠다는 의사를 표시한다.

그의 차는 도요타 컨버터블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가는 도중 천천히 그의 얼굴을 보니 대략 스무살 정도 돼 보인다. 이름을 묻는다. 이 정도의 영어는 알아듣는지 대답한다. 그의 이름은 프란체스코다. 이탈리아인 특유의 검은 곱슬 머리와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다시 이런 저런 영어 단어를 나열한다.

그의 말을 종합해보면, 살레르노에는 택시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7시 즈음해서는 도로 정체가 무척 심각하다. 그의 집으로 가는 방향이 마침 살레르노 기차역 주위를 지나간다. 기차역 바로 근처에 SITA 버스 정류장이 있으니 버스든, 기차든 골라 타면 된다는 얘기다. 거의 40여분 동안 머리에 김이 나도록 이 대화를 했으니 답답할 만도 한데, 오히려 애쓰는 그의 모습에 더 큰 감동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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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높은 건물이 보이고, 백사장으로 보이는 해변가가 나타나자 그가 도로 한 켠에 차를 세우고 손가락으로 ‘train’과 ‘bus’를 외친다. 너무 고마워 보답이라도 하려는 순간 뒤에서 경적을 울리고 난리가 아니다. 2차선 밖에 되지 않는 도로인데다, 마침 신호가 바뀐 탓에 전화번호조차 묻지 못했다. 얼굴 가득 함박 웃음을 짓고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프란체스코. 벅찬 감동에 눈 앞에서 그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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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8시가 되지 않아 버스가 끊기지는 않은 모양이다. 버스 정류장에는 제법 사람들이 많이 서 있다. 버스 티켓을 끊으면서 나폴리행 SITA 버스 시간을 묻는다. 아직 막차가 남았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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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시내가 눈에 들어온다. 살레르노는 상당히 현대적인 도시다. 4차선 도로와 7~8층은 됨직한 빌딩들, 그리고 색색의 스포츠카에 이르기까지 분명 포시타노나 아말피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풍경이다. 사람들도 낯선 동양인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 마음도 편하다.

여전히 이슬비가 내린다. 문득 아레치 성이 떠올라 두리번거린다. 방금 전 아말피에서 오던 길가에는 해변이 있었으니 아무래도 버스 정류장 뒷편의 산자락에 있으리라. 막 자리를 옮기려는 순간 SITA 버스가 시야에 들어온다. 더 이상의 모험은 포기하고 버스에 오른다. 긴장이 풀리면서 앉자마자 잠이 든다. 피곤한 하루였지만, 이처럼 감동적인 하루도 없었던 듯 싶다.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