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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Italy)

이탈리아 여행 ② 폐허 속에서 들리는 로마 제국의 숨소리


마처럼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이 있을까? 스페인 광장 앞 콘도티 거리의 화려한 명품가를 걷다보면 가장 현대적이고 세련된 도시가 로마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시스티나 거리를 지나 바르베리니 광장에만 들어서도 과거 르네상스 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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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라 로톤다 광장에 들어서면 로마의 시계는 몇 세기가 아니라 1,900여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광장 한 켠에 묵직하게 자리잡은 판테온은 과거 로마 제국의 위용을 대변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처럼 여러 개의 시계가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도시 '로마'의 힘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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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시간대를 억지로 분리시켜 감상하고자 하는 나와 같은 여행객들에게는 여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바로크 시대의 유적으로 둘러 쌓인 나보나 광장만 하더라도 과거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경기장의 외벽을 활용한 아파트들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어, 로마 제국의 현장을 체험하고 싶다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다.

르네상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포폴로 광장도 마찬가지다. 로마 가도의 역사를 대변하는 플라미니아 가도가 바로 이 곳, 포폴로 광장을 관통한다.

결국 물리적으로 로마 제국만을 분리해내는 작업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의 유적을 찾는 작업은 (지리적 측면이 충분히 감안된) 4개의 꼭지점을 중심으로 인근의 유적지를 찾아나서는 형태로 진행하기로 했다. 내가 구분한 4개의 꼭지점은 동쪽의 디오클레치아노 욕장, 서쪽의 판테온, 남쪽의 콜로세움, 북쪽의 황제묘(마우솔레움 아우구스티)이다.

숙소가 떼르미니 역 근처였던 관계로 첫 번째 행선지는 디오클레치아노 욕장으로 결정됐다. 목욕탕은 로마인의 독특한 사회성이 가장 잘 반영된 건물 가운데 하나다. 로마 시대의 목욕탕은 단지 청결한 위생 관리를 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체육 시설과 놀이 공간이 아우러진 일종의 종합 휴식시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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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디오클레치아노 욕장은 크기와 화려함에서 로마 시대 최고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파손 정도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팔 다리가 잘려나간 석상과 도저히 재활용이 불가능해 보이는 부서진 원주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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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로마 제국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작업이 첫 번째 관문부터 난관에 부딪힌 셈이다. 다행인 건 욕장 한 켠에 자리잡은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 여타 르네상스 시대 성당들과는 달리 디오클레치아노 욕장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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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내부는 로마 건축의 특징이자 향후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판이 된 교차 볼트와 돔, 코린트식 열주가 마치 3각 편대처럼 어우러져, 웅장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발산하고 있었다. 게다가 채광창이 많아 별다른 조명조차 필요 없었다.

일반적으로 교차 볼트가 많이 사용되고, 채광창이 많이 뚫린 곳은 목욕탕에서도 냉탕과 미온 욕탕인 경우가 많다.

밝은 채광은 목욕탕 공간의 유흥적 성격과 맞고 그러한 곳일수록 기둥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볼트가 많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이 점으로 미뤄보건대 이 성당이 위치한 곳은 과거 디오클레치아노 욕장의 냉탕, 혹은 미온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하튼 미켈란젤로의 높은 안목 덕분에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꼭지점인 북쪽의 황제묘를 가기 전에, 더 북쪽에 위치한 포폴로 광장을 먼저 찾았다. 포폴로 광장은 기원전 200여년 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플라미니아 가도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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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포폴로 광장을 중심으로 북쪽은 플라미니아 가도(이탈리아 국도 3번), 남쪽은 코르소 거리(르네상스 시대부터 이름이 변경됨)라고 부르고 있지만, 예전에는 포로 로마노에서 리미니까지 이르는 이 길을 모두 플라미니아 가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작 기대와는 달리 플라미니아 가도는 머리 속에 그려왔던 로마식 가도와는 너무나 달랐다. 자갈과 토사 대신 아스팔트가 채워져 있었고, 로마 군단을 열렬히 환영하던 도로변 건물의 베란다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길게 뻗은 직선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여서, 저 멀리 베네치아 광장의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저 흰 색 타자기 대신 캄피돌리오 언덕이 한 눈에 보였을 것이다. 이탈리아 내에서도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철거에 대한 논란이 여전하다고 한다.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옮길 수 없다면 철거했으면 싶다. 과거 조선총독관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경복궁처럼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에 가려 신성한 캄피돌리오 언덕이 보이지 않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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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콜로냐 광장까지 내려오고야 말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리페따 거리를 이용해 마우솔레움 아우구스티를 갔어야 했는데, 베네치아 광장을 바라보다가 코르소 거리로 들어서고 만 것이다.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온 김에 남쪽부터 들르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콜로냐 광장에는 5현제 가운데 하나이자 <명상록>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전승 기념비가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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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이 원기둥은 철학을 논하고자 했지만 전쟁으로 얼룩진 시기를 보내야만 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게르만 부족들의 연합을 차단하는 데 집중해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은 뒤 세워진 것으로, 총 30m 길이에 20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로마인 특유의 복장과 막사, 그리고 게르만족 특유의 복장과 전투법을 살펴볼 수 있는데, 원래의 의도(대중에 대한 교육 혹은 홍보 목적)와는 달리 지금은 오벨리스크처럼 장식용 조각으로 대우받고 있어 기분이 착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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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판테온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 그러나 코르소 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포로 로마노로 어서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어서 판테온을 찾는 일은 나중으로 미뤘다. 베네치아 광장을 지나자 책 속에서만 보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무솔리니가 베네치아 궁에서 콜로세움이 보이지 않는다며 벨리오 언덕을 깎은 뒤 황제들의 포럼까지 흙으로 메워가며 만들었다던 비아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다.

이 직선형 4차선 도로 끝에는 로마의 상징인 콜로세움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고, 좌우에는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한 모습으로 황제들의 포럼과 포로 로마노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곳을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들을 읽었던가? 나는 재빨리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받은 지도와 로마인이야기에서 복사해온 로마 시대의 포로 로마노 지도, 그리고 가이드북에 그려져 있는 지도 3개를 펼쳐 하나 하나 장소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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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찾은 곳은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돌자마자 보이는 포룸 율리움, 즉 카이사르 포럼이었다. 이렇다할 푯말조차 보이지 않아 지도를 여러 번 살펴야만 했는데, 중앙에 놓인 베누스 신전을 보고서야 이 곳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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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에서 이긴 뒤 자신의 승리를 도운 베누스 여신에게 바치기 위해 지었다는 베누스 신전은 달랑 세 개의 열주(order)가 전부였다. 그 마저도 철골과 시멘트에 기대고서야 겨우 서있을 정도였는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 곳이 카이사르 포럼에서 가장 양호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나머지 부분은 도저히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흔적만 남아 있었다. 마치 이러한 상황이 못마땅하기라도 한 듯, 포럼 앞 길가에 있는 카이사르 동상은 자신의 포럼을 외면하고(등지고) 서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들어선 포로 로마노는 지진이라도 맞은 듯 바닥은 움푹 꺼져 있었고(물론 과거 무너진 건물 위에 토사가 쌓여 현재의 지표면이 높아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돌 조각들뿐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지만, 실제로 보고 나니 말문이 막혔다. 로마 시내에서 로마 제국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이 곳, 포로 로마노라는데 '과연'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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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0년에 자행된 예루살렘 및 성전 파괴를 기념하는 티투스 개선문, 르네상스 시대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줬다는 콘스탄티노 대성당, 로마 건축 양식의 대표라는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황후 신전, 아직도 장미향이 가득한 베스타 신전과 베스탈의 집, 키케로와 안토니우스가 연설했다는 로스트룸, 바이런이 이름 없는 웅변가들이 묻힌 기둥이라고 말한 포카의 기둥, 이오니아식 여덟 기둥이 인상적인 사트루누스 신전, 그리고 연설 목소리가 큰 변호사가 박수갈채를 받았다는 바실리카 율리아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온전한 형태가 없었다. 게다가 각 유적지마다 영어로 된 안내판 하나 없으니 가이드북을 뒤져가며 위치를 찾느라 꽤 애를 먹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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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이 파손돼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고, 따뜻한 안내판이나 복원 모형도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아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쳐 지나듯 둘러보는 식이었다. 어떻게 온 길인데 싶어 천천히 각 건물들의 위치를 샅샅이 살핀 뒤 나는 다시 한 바퀴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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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과는 달리 슬슬 건물들의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열심히 참고 서적들을 뒤져가며 각 건물들의 용도와 내력을 되짚어 나갔다. 신전, 회랑, 상거래를 위한 사무실과 점포, 학교, 그리고 광장에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를 살피다 보니 제법 재미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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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카이사르 신전 근처에 앉았다가 또 한 바퀴를 돌았다. 참고로 이번 여행 기간동안 포로 로마노만 총 8번 정도를 돌았다. 캄피돌리오 박물관과 팔라티노 언덕, 그리고 콜로세움에서 내려다 본 것까지 치면 10번도 넘는다.

어쨌거나 이제 가이드 북 없이도 건물의 이름과 용도를 알게 되자, 무너질 듯 위태롭던 건물들에서 과거 위풍당당했던 로마 제국의 기억들이 하나 둘 되살아나는 듯 했다. 2000년도 훨씬 전 이 곳은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이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시끄럽게 연설을 하고, 판사들은 바실리카에서 형을 집행하고, 사제들은 비아 사크라를 걸으며 종교 행사를 벌였을 것이다.

게다가 카이사르 시절부터는 전쟁에서 이겼는지, 원로원 회의에서 어떤 내용이 거론됐는지를 알 수 있는 '악타 세나투스'(원로원 의사록으로 세계 최초의 신문이나 마찬가지)를 읽기 위해 사람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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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이 들자 직접 만져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굳이 미련을 갖지 않도록 장소를 옮겨 팔라티노 언덕으로 향했다.

지도상으로는 분명 서쪽으로 향하는 길이 표시돼 있는데, 입구를 찾기가 쉽지가 않다. 일단 우르르 몰려다니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을 따라 움직였는데, 반대편에 위치한 콜로세움 쪽으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굳이 되돌아갈 생각이 없어 당일 루트에서 남쪽 꼭지점으로 설정해 놓았던 콜로세움을 먼저 살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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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로마와 현재의 로마 모두를 대표하는 이미지 '콜로세움'. 그 말 자체가 주는 여운 때문인지 콜로세움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가슴이 떨린다.

안으로 들어서기에 앞서 먼저 외관을 감상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콜로세움 북쪽에서 1, 2, 3층의 서로 다른 열주(1층 도리스 양식, 2층 이오니아 양식, 3층 코린트 양식)를 지켜보는 일은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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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독일어, 일어, 중국어 등 수십가지의 외국어들이 정신 없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데다가, 여기 저기에서 비누방울을 뿜어대는 이탈리아 상인들 때문에 차분한 감상이란 사치스러울 정도였다.

차라리 다른 방향에서 보자는 생각에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 걷다보니 그 많던 관광객이 온데간데없다. 덕분에 편안하게 조목조목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관광객들이 없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콜로세움의 남쪽 부분은 북쪽에 비해 더 많이 훼손돼 있었다. 북쪽처럼 다양한 열주는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누가 보더라도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추가 건축 재료가 유난히 거슬렸다. 아무래도 안되겠다는 생각에 사람들을 비집고 외관을 살피다가 결국 안으로 들어섰다.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란 볼트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너무 낡아 일부는 철골물로 지탱해뒀는데, 거의 2천년 전에 이와 같은 건축물을 지었다니 로마인의 건축술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손 때 가득 묻은 벽면을 바라보며 올라간 2층. 드디어 콜로세움 내부가 눈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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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 바라본 콜로세움 내부는 공사현장을 방불케 했다. 축대처럼 길게 늘어선 벽채와 반쯤 덮힌 시멘트, 그리고 출입을 제한하는 안전바에 이르기까지 마치 이제서야 공사에 착공한 현장을 직접 참관하고 있는 기분이다.

좀 더 높은 곳에 오르면 다를까 싶어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에서 바라본 풍경 역시 2층에서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우연히 발견한 계단형 관중석의 잔해가 지금까지의 불만을 호기심으로 바꿔놓았다.

사실 콜로세움은 원형경기장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앉았던 관중석의 흔적을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2층을 한 바퀴 돌았는데도 보이는 거라고는 군데 군데 파여 있는 벽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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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3층에서는 지금의 야구장이나 축구장처럼 계단형 관중석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갑자기 지금의 돔형 구장처럼 덮었다 벗겼다했다는 덮개도 찾아보고 싶어졌다.

물론 그 흔적을 찾을 만큼 고고학에 대한 지식도, 그 자리를 가르쳐 줄만한 책도 갖고 있지 않아 포기했지만. 그래도 이 호기심은 나중에 로마를 떠나던 날 다시 한번 나를 콜로세움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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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을 나와 향한 곳은 황제들의 포럼이다. 과거 베스파시아누스의 평화 포룸으로 추정되는 지대에는 거대한 인포메이션 센터를 비롯해 다양한 건물들이 세워져 있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네르바 포룸도 비에 데이 포리 임페리알리와 지선 도로들에 의해 자취를 감췄고, 아우구스투스 포럼 역시 녹지와 도로에 의해 처참하게 뭉개져 있었다. 그나마 양호한 곳이 트라야누스 포럼이지만, 그것은 순전히 상대적인 평가일 뿐이다.

트라야누스 신전은 이미 성당으로 뒤바뀌었고, 넓은 포럼 광장은 흙과 잔디에 파묻혀 있는데다가, 시장은 술과 식사를 파는 리스또란떼로 사용되고 있다.

내가 방문한 날짜에는 트라야누스 시장 내에서 로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미술 전시회를 열고 있었으며, 트라야누스 원기둥 주위에는 공사를 이유로 쇠파이프와 철망을 씌워놓아 가뜩이나 실망했던 나를 더욱 실망스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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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엇보다 안타까웠던 것은 전쟁 필름이나 다름없는 원기둥을 마치 장식품처럼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오노 나나미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직접 다키아 전투 장면 하나 하나를 세심히 살펴보겠다고 다짐한 나에게는 원기둥 위쪽의 부조를 전혀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근처에 몇몇 건물이라도 남아있다면 올라가서 망원경이라도 들고 봤을 터인데, 워낙 휑한 공간에 비석처럼 남겨져 있어 트라야누스의 전쟁 이야기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포기해야만 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포로 로마노에 다시 들어섰다. 천천히 또 다시 포로 로마노를 즐기며 이번에는 제대로 팔라티노 언덕을 찾았다.

팔라티노 언덕도 부서진 돌기둥과 잡초들이 무성하기는 마찬가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곳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지 않아 유적 발굴이 비교적 수월하다는 점이다. 덕분에 여기 저기에서 발굴 작업이 펼쳐지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온 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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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찬 바람을 헤치고 팔라티노 언덕 서편의 도미티아누스 궁터로 향했다. 이 곳에서는 영화 <벤허>에서처럼 전차 경기가 펼쳐지던 치르쿠스 막시무스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위에서 바라본 치르쿠스 막시무스는 커다란 타원형 부지만 아니라면 유적지라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하다. 그 때문인지 여타 유적지와는 달리 한산한 분위기다.

이쯤에서 다시 호기심이 발동했다. 마지막 남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궁을 스치듯 살펴보고 서둘러 팔라티노 언덕 남서쪽에 위치한 치르쿠스 막시무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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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치르쿠스 막시무스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바라본 것과 마찬가지로 관중석의 일부로 추정되는 남동쪽의 잔해를 제외하고는 드넓은 녹지뿐이었다.

천천히 산책하듯 한 바퀴를 돌아 봤지만, 어디에도 치르쿠스 막시무스에 대한 역사와 유래, 그리고 원형을 보여주는 안내판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다시 둘러봤지만, 공허한 동작에 불과했다. 실망이 커서인지 갑자기 힘이 빠진다. 그래서 이 참에 지친 다리도 쉴 겸 벤치에 앉아 다음 장소를 물색하기로 했다.

포로 로마노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머문 탓에 약간의 차질이 생기기는 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두 개의 꼭지점인 서쪽의 판테온과 북쪽의 황제묘를 찾기에 시간은 충분했다. 천천히 자리를 털고 판테온을 향해 걸었다. 물론 이번에도 판테온으로 직행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유적들을 둘러보며 가기로 했다.

치르쿠스 막시무스에서 가장 가까운 유적은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조카이자 양자였던 마르첼루스를 기리며 지었던 마르첼루스 극장이다. 카피톨리노 언덕 바로 뒷편에 있는 이 곳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렸다. 오래 된 낡은 집들 사이에 3개의 원주만 남은 아폴로 신전과 나란히 자리잡은 마르첼루스 극장은 콜로세움처럼 전체가 보존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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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뚱아리를 잃어버린 코린트식 주두와 여기저기 뜯겨져 나간 벽채만 놓고 보면 그 옛날 15,000명을 수용했던 위용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 바퀴 돌다 보면 생각보다 그 터가 넓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곳 역시 나보나 광장의 아파트처럼 외벽과 1층의 골조를 이용해 현재까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마르첼루스 극장을 찾은 김에 인근에 지어졌던 폼페이우스 극장 터도 찾아보기로 했다. 로마 최초의 상설 극장이자 석조 극장이었던 폼페이우스 극장.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괜시리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에 따르면 폼페이우스 극장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경기장 바로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 사실만으로 찾기에는 부족했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생각보다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폼페이우스 극장이 있던 곳으로 확신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연갈색 외관을 자랑하는 폼페이우스 극장 호텔(Hotel Teatro di Pompeo)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내부까지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이 곳에서 근무하는 사람에 따르면 내부에는 제법 과거의 유적을 활용해 식당을 만들어놨다고 한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아쉬움을 남기며 판테온을 따라 걷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소나기 정도로 생각하고 근처에 있는 성당으로 몸을 피했는데, 좀처럼 그칠 생각을 안한다.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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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내가 서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정류장을 찾다보니 이상한 유적이 있는 곳까지 오고 말았다. 우선 사진 몇 장을 찍고 간단하게 메모만 해두고 버스를 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곳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 당했던 장소이자, 로마의 독자적 건축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장소였다. 결국 귀국하던 마지막날 이 곳을 다시 찾았는데, 그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 곳이 바로 아레아 사크라 디 라고 아르젠티나(아르젠티나 호수의 성역이라는 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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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겨우 두어 정거장을 갔을 뿐인데 그 동안 비가 그쳤다. 판테온을 찾았던 시각은 대략 오후 7시경. 문을 열었을 리 만무하다. 서두를 필요가 없어 여유부리며 막 미네르바 광장 앞에 도착했는데, 또 다시 비가 오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판테온 정문 쪽으로 뛰었다.

비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아 천천히 정문과 정문 앞 열주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여기 저기에서 환호성이 들려 온다. 고개를 돌려 미네르바 광장 쪽을 살펴보니 분수 안에서 뭔가 벌어지고 있었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두 명의 여자들이 레슬링을 방불케하는 물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흥분한 나머지 웃옷을 벗어 던지자 지켜보던 남자들이 휘파람을 분 것이었다.

열광적인 응원이 뒷받침되자 둘은 더욱 격렬한 물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머리채를 잡고 물에 집어넣는가 하면 심하게 밀쳐 뒤로 나자빠지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한번 환호성이 일었다. 치마를 입었던 여자가 넘어지면서 속옷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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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중에 경찰이 출동한 뒤에야 이들은 분수를 떠났는데, 어찌나 경찰을 야유하던지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그 뒤에도 빗줄기는 한참동안 계속됐다. 아직 가보지도 못한 황제묘는 고사하고, 판테온조차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상태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비가 잠잠해진 것을 확인하고 숙소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여행 내내 황제묘와 판테온을 들르지 못한 사실이 가슴에 남아 있던 터라, 결국 귀국하던 날 다시 찾고야 말았다. 마지막 날은 태양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래서인지 판테온은 무척이나 생소한 느낌이었다.

'모든 신들의 성전'이라는 접두사에 걸맞게 판테온은 웅장한 모습으로 주위 경관을 압도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의 바실리카를 장식하기 위해 금을 벗겨내기 전에는 지붕이 금을 씌운 청동 기와로 덮여있어 더 웅장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사실들을 되새기며 드디어 들어선 판테온 내부. 비교적 보존이 잘 돼 있다고는 하나, 여기 저기 뜯겨져 나간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초기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곳은 역시 지붕의 눈, 즉 돔 한 가운데 나 있는 구멍이다. 구조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조화로운 격자 패턴의 돔 꼭대기에 있는 이 곳은 판테온의 유일한 조명답게 강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마치 폭풍우가 지난 뒤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그 모습은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구조적 안정성과 조화로운 내부 공간, 그리고 장엄함에서 후세의 많은 건물들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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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묘 역시 마지막 날에서야 들를 수 있었다. 다만 판테온처럼 천천히 둘러보지는 못했다.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기도 했지만, 영묘에 대해 아는 지식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봐왔던 부조물과 그 규모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쉽게 흥미가 떨어지고 만 것이다.

로마 제국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이렇게 하루를 꼬박 들이고, 나중에 추가로 시간을 할애하고 나서야 겨우 겨우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건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 중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어쩌면 가장 먼저 들렀어야 했을 지도 모르는 아피아 가도를 가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아피아 가도만 보는 것이라면 치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시작된 아피아 가도를 밟아봤으니 아쉬울 게 없다. 내가 못내 아쉬운 점은 아피아 가도를 따라 늘어서 있는 각종 유적들이다. 포로 로마노처럼 너무 많이 파손돼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을지라도 이 곳들은 로마 제국을 알아가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다음에 로마를 찾게 되면 가장 먼저 이 곳을 가리라 다짐해 본다.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