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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Italy)

이탈리아 여행 ④ 바티칸에서 들려오는 미켈란젤로의 메아리


마에 하루밖에 머물 수 없다면 어디를 가야하는가? 통일된 답변을 찾기란 불가능하지만, 아마도 가장 많은 추천지는 바티칸 시국(바티칸 박물관, 산 삐에뜨로 성당 및 광장)이 아닐까 싶다. 종교적, 문화적, 역사적 가치는 차치하더라도, 로마에서 가장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 바로 이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결정체인 바티칸 시국을 찾은 건 로마에 도착한 지 두 번째 날이 되어서다. 워낙 긴 대기줄로 악명 높은 곳이라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부산을 떨며, 서둘러 떼르미니역에서 64번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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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버스는 거의 만원이다. 행여나 지나칠세라 두리번거렸건만 결국 버스 종점까지 가고야 말았다. 버스 종점에서 바티칸 박물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행렬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겨우 여덟시가 막 넘었을 뿐인데, 대기줄은 바티칸 박물관의 기다란 벽을 지나 산 삐에뜨로 광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뛰다시피 행렬에 동참했지만, 결국 두 시간 정도를 길거리에서 낭비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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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은 마치 하나의 미로와 같다. 때문에 철저한 준비 없이 다니다가는 하루를 꼬박 투자해도 부족하다. 애초부터 시스티나 예배당만 둘러볼 계획이었기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시스티나 예배당 위치부터 확인했다. 친절하게도 박물관 입구에서 시스티나 예배당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화살표가 둘러보는 데에만 5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D코스였음을 당시 어찌 알았겠는가? 친절한(?) 화살표를 따라 처음 찾은 곳은 이집트관이다. 그 동안 여러 박물관에서 이집트 유물을 많이 봐왔던 탓에 일부(미이라)만 둘러본 채 서둘러 갤러리를 빠져나왔다.

안내 표시는 이집트관을 지나 건물 밖을 향하고 있었는데, 커다란 황금 구체와 솔방울 조각이 인상적인 피냐 정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평소 같으면 여유롭게 산책이라도 하겠지만, 이 날은 길거리에서 낭비한 두 시간이 아까워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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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가려면 동쪽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미켈란젤로가 극찬했던 라오콘과 토르소는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팔각정원으로 향하는 복도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마치 안내 표시마냥 길게 진열돼 있다. 눈에 익숙한 황제들의 두상을 포함해 신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전신상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다만 이미 마음은 라오콘에 가 있었기에 일일이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바티칸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인 라오콘과 토르소는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할 정도로 포스(Force)가 느껴진다.

거대한 뱀과 사투를 벌이는 라오콘의 뒤틀린 근육과 사지가 소실된 채 몸체만 남아있는 토르소의 긴장된 육체는 해부학적 지식이나 예술적 영감과 상관없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힘이 있다. 하물며 설명이 깃들여진다면야. 난 몇 분간이나마 단체 관광객들과 궤도를 같이하며 고대 로마 조각상들이 즐비한 벨베데레 정원과 팔각 정원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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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원래 계획대로 시스티나 예배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건 그로부터 20여분 뒤. 금방이라도 도착할 것 같던 시스티나 예배당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대신 촛대 갤러리, 융단 갤러리, 지도 갤러리와 같은 화려한 복도가 연이어 펼쳐진다. 그러던 중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도록 내 발목을 붙잡은 건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라파엘로였다.

헬리오도루스의 방에 새겨진 <성 베드로의 해방>도 감동이지만, <아테네 학당>은 역시 역작이었다. 브라만테가 설계한 템피에토와 비슷하게 생긴 학당에서 신학, 철학, 법학, 예술 등 학문의 네 영역을 대표하는 54명의 고대 신학자와 과학자들이 한가로이 노닐며 담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아테네 학당>은 좁은 방의 한 쪽 벽면을 완전히 채우고 있었는데, 라파엘로의 여타 작품들과는 달리 동적인 분위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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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안내판을 따라 좁은 통로를 이리 저리 빠져나가다 보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현대 미술 작품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게 된다. 세부적인 표현과 섬세한 구성이 돋보이는 고전 작품들과 달리 직설적인 표현과 단순화된 구성이 매력적인 현대 미술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은 바티칸 박물관이 선사하는 또 다른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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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시 바티칸 박물관의 백미는 시스티나 예배당이다. 두 시간 가량을 헤매다(?) 도착한 시스티나 예배당은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였다.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던 미켈란젤로의 <창세기>와 <최후의 심판>은 소름끼칠 정도의 전율과 흥분을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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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을 가져오지 않은 게 어찌나 후회가 되던지. 한 장면이라도 놓치기 싫어 가이드북을 꼼꼼히 살피고, 다시 목이 꺾여져라 천장을 바라보기를 30여분. 만원 버스보다 더 빽빽이 사람들이 밀려들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비록 시스티나 예배당에 안치된 미켈란젤로의 역작만큼의 감동은 없었지만, 출구로 향하는 과정에 만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히에로니무스>,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 멜로초 다 포를리의 <음악천사>, 그리고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매장> 역시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특히 무척이나 사실적이고 자극적인 종교화를 많이 남긴 카라바조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의 매장>은 시각적인 경외감을 자아냈다.

독특한 나선형 계단을 따라 박물관을 나선 시각은 오후 1시가 좀 넘어서였다. 뿌듯함에 배고픈 것도 잊고, 곧바로 싼 삐에뜨로 대성당으로 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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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 삐에뜨로 대성당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도 기다란 대기줄이 광장 한 쪽을 덮을 정도였다. 또 다시 두어시간을 기다리기 싫어 잠시 광장 중앙에 위치한 분수 앞에 자리를 잡았다. 한 낮의 태양을 머금은 싼 삐에뜨로 광장은 무척이나 활기차 보였다. 대성당과 광장을 둘러싼 284개의 원주를 천천히 음미하다 대기줄을 살펴보니 이제 제법 원활하게 입장이 진행된다.

겨우 20∼30여분만에 들어선 싼 삐에뜨로 성당. 엄청난 높이에 놀랐고, 화려한 색채에 놀랐고, 수많은 인파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리고 곧바로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바로크가 한 공간에 존재하는 싼 삐에뜨로 성당이야말로 로마에 가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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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대리석과 우아한 종교화, 그리고 하늘에 떠 있듯 매달려 있는 향료단지에서 풍겨져 나오는 향이 어울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물론 좀 더 살펴보다 보면 지나치게 화려해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싼 삐에뜨로 성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단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다. 발다키노, 성베드로의 성좌/보좌도 감탄을 자아내지만, 대리석 한 덩어리로 조각해 만든 <피에타>에 비하면 되려 평범해보이기까지 한다.

박물관과 광장에서 너무 여유를 부린 탓에 천천히 성당 내부를 둘러볼 수가 없었다. 바티칸 시국 외에 싼탄젤로 성을 둘러볼 계획이어서 조금은 서둘러 싼 삐에뜨로 성당 전망대로 향했다.

그러다 전망대로 가는 성당의 모퉁이에서 우연찮게 바티칸 시국 근위병의 교대식을 목격하게 됐다. 비록 버킹엄 궁전의 영국 근위병들처럼 기품있는 의상과 절도있는 동작, 근엄한 음악이 어우러진 교대식은 아니었지만, 독특한 의상 때문인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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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유자적 여유를 부리다보니 시계가 벌써 4시를 가리킨다. 발걸음을 재촉해 전망대 출입구에 줄을 섰다. 전망대에 오르는 방법은 엘리베이터와 걷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많은 이들은 537개의 계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걸어 올라서지만 오르는 과정에서 지쳐버려 막상 정상에 올라와도 전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시간적 여유도 없고, 고행(?)할 생각도 없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바로 전망대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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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 삐에뜨로 성당 쿠폴라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바티칸 시국과 로마의 전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동서남북 어느 곳을 바라봐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만,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곳은 동쪽과 북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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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은 싼 삐에뜨로 성당 쿠폴라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으로, 아름다운 싼 삐에뜨로 광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멀리 싼탄젤로 성도 보인다. 특히 도도히 흐르는 로마의 젖줄 테베레 강은 잠깐이나마 넋을 잃게 만든다. 비록 동쪽만큼은 아니어도 싼 삐에뜨로 성당 북쪽도 눈을 즐겁게 한다.

바티칸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는 곳인데, 박물관 내부에 있을 때에는 몰랐던 외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기다랗게 늘어선 것이 마치 퀴리날레 언덕에서 마주쳤던 대통령 관저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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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를 내려 이 날의 마지막 코스인 산탄젤로 성을 향했다. 싼 삐에뜨로 광장에서 일직선으로 나 있는 화해의 길을 따라 테베레 강에 다다르면, 좌측에 보이는 원통형의 성이 바로 싼탄젤로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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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35년 황제의 묘로 쓰기 위해 세워졌지만, 지금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이 성은 성 중앙에 날개를 활짝 편 천사 동상 때문에 싼탄젤로 성으로 불린다고 한다. 유사시 교황의 주거지로 쓰이던 요새였던 만큼 곳곳에 요새의 흔적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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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탄젤로 성은 요새처럼 만들어진 구조도 흥미롭지만, 역시 전망대가 가장 멋지다. 이 곳 전망대에서는 싼 삐에뜨로 성당과는 또 다른 풍경을 접할 수 있다.

그 중 테베레 강을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색깔이 너무 탁해 과연 괴테가 수영했던 그 곳이 맞는지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수천년부터 로마인의 젖줄 역할을 해왔던 곳이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싼탄젤로 성 앞에는 체코 프라하 까를교의 모델인 싼탄젤로 다리가 있다. 이 다리에는 아름다운 천사 조각상들이 좌우로 장식돼 있는데, 천사의 성이라는 싼탄젤로 성과 어울려 절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그래서인지 다리를 건너는 내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이 곳만큼 천사상이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베르니니는 바로크 시대의 대가답게 각각의 천사상마다 우아한 동작과 기품있는 표정을 담아냄으로써 다리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