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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Italy)

이탈리아 여행 ⑦ 현대 이탈리아의 자화상 '밀라노 공화국'


라노를 찾은 건 순전히 두오모를 보기 위해서다. 물론 전세계 패션의 메카이자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지라는 사실만으로도 밀라노를 찾을 이유는 충분했지만, 그보다는 고딕 양식의 걸작이자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두오모를 보려는 게 진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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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의 밀라노 여행은 시작부터 난관을 겪게 된다. 피렌체에서 만난 배낭여행객들로부터 밀라노 두오모가 현재 커다란 장막으로 덮힌 채 공사가 한창이라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갈지 말지를 두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공사중인 두오모라도 보기 위해 가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아침, 이왕 가는 것 좀 더 부지런을 떨자는 생각에 새벽같이 일어나 기차역을 향했다. 일찌감치 서두른 탓에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S.M.N)역에서 6시발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밀라노에 도착한 시각은 대략 10시 30분경, 분명 서두른 보람이 있었다. 밀라노에 도착한 이후에도 여유부릴 틈이 없다. 하루만에 밀라노를 섭렵해야 하는 만큼 마음이 급하다. 게다가 하늘까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 부을 태세다. 서둘러 숙소를 잡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 밀라노 두오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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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광장 역에 내려 바라본 두오모는 혹시나 했던 나의 기대를 져버리고, 커다란 ‘미사보’로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덕분에 넓은 광장에 놓여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인다. 사실 이 기마상은 조금 의외다. 밀라노 시민들은 여전히 가난한 남부 이탈리아와의 분리(혹은 독립)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도심 한복판에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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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을 뒤로 하고 두오모를 향해 걷는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두오모답게 밀라노 두오모는 다가설수록 사람을 압도한다. 도저히 한치의 틈조차 발견할 수 없는 정면과는 달리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내부, 정면을 제외한 측/후/상면, 그리고 전망대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이탈리아 고딕 양식의 결정체를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 200여년에 걸쳐 완성돼 정통 고딕 양식과는 약간 차이가 있기 때문인지 좀더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이러한 느낌은 더욱 확실해진다. 부챗살이나 그물 모양으로 얽힌 볼트는 마치 하나의 연속된 표면처럼 이어져 있고, 프레스코화는 하늘에 둥실 둥실 떠 있다. 성모상이 돔 형태의 구조물 위에 놓여진 점이나 십자가를 천장에 매달아 둔 점도 인상적이다. 상하 높이에 비해 좌우 폭이 넓고, 신랑과 측랑이 별다른 구분 없이 배치돼 있어 전체적인 공간 구성도 마치 하나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기도용 양초조차 다른 성당들과는 달리 길고 폭이 좁은 제품을 사용하고 있어 ‘확실히’ 뭔가 특별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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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시 밀라노 두오모의 자랑은 수많은 첨탑과 화려한 부조로 치장된 외관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이 ‘대리석으로 만든 시’라고 칭송하고, <챠탈레 부인의 사랑>으로 알려진 D.H. 로렌스가 ‘고슴도치를 흉내낸 성당’이라고 표현한 이유도 바로 탄성이 절로 나오는 외부 장식 때문이다.

실제로 성당을 둘러 싸고 있는 135개의 첨탑과 여러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2,245개 이상의 대리석 조각상은 마치 돌로 뜨개질을 한 것처럼 정교할 뿐더러,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전망대(혹은 지붕)에 오르면 첨탑과 조각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각각의 첨탑에는 교황이나 성인들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는데, 하나하나가 걸작이라 불러도 상관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다만 어느 곳에도 안내판 하나 없을뿐더러, 가이드 북 어디에도 이들을 소개하지 않아 그냥 ‘구경’하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밀라노 두오모의 첨탑 가운데 가장 높은 첨탑 끝에 장식돼 있는 조각상만큼은 확실히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높이 4미터의 황금빛으로 빛나는 이 조각상은 바로 성모 마리아를 새긴 것으로, 모든 조각상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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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두오모 전망대에서 내려보는 밀라노 시내도 피렌체의 그것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근사하다. 맑은 날에는 이 곳에서 알프스 산맥도 보인다던데, 안타깝게도 흐린 날씨 탓에 알프스까지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관망하듯 바라보는 밀라노 시내는 듬성듬성 보이는 붉은 지붕과 여기 저기 솟아오른 현대식 빌딩이 어우러져 은근한 매력을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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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오모를 나와 광장 서측에 위치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로 향한다.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갤러리를 꼽으라면 나폴리의 움베르토 1세 갤러리와 밀라노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가 쌍벽을 이룬다고 한다. 실제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는 마치 화려한 궁전에 들어선 것 만큼이나 화사하다. 촘촘하게 꾸며진 원주와 천장을 덮고 있는 유리창도 멋지지만,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4가지 색으로 꾸며진 바닥 모자이크가 인상적이다.

갤러리를 빠져 나오면 꿈의 오페라 하우스인 스칼라 극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페라를 잘 모르는 사람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은 한 번쯤 들어서 알고 있지 않을가? 세계 최초의 민간 극장으로서 베르디, 푸치니 등의 작품들이 초연됐던 바로 그 곳이 스칼라 극장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공사중이어서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이 곳에서 오페라를 감상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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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라 극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폴디 페촐리 박물관으로 향한다. 시계는 벌써 오후 2시를 넘어 서두를 필요가 있다. 만테냐와 보티첼리를 만날 수 있는 폴디 페촐리 박물관은 여러 상가 사이에 방치된 듯 가려져 있어 무심코 지나쳐버릴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여행객들에게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어서 그런지 거의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발자국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 곳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입구 중앙에 세워놓은 분수에서 물 흐르는 소리 뿐.

워낙 좁은 건물에 세워진 미술관이라 그런지 앞에 광장도 없을 뿐더러 전시실도 2층부터 시작된다. 그렇지만 빨간 색 융단이 깔린 계단을 오르는 기분은 마치 오래된 성에 손님으로 초대받은 느낌이다. 조상들의 초상화와 멋진 풍경화를 걸린 이 계단을 타고 가면 왠지 눈 앞에 멋진 테라스와 품격있는 친구들이 기다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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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디 페촐리가 과연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벽 하나 하나마다 새겨진 조각상들과 그에 걸맞게 놓여진 작품들을 감상하다 면 굉장히 고급스런 취향을 가진 상류 사회의 일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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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지금까지 봐왔던 박물관이나 미술관과는 달리 전시된 작품들보다 전시실로 쓰이는 방들이 더 아름답다. 사소한 것 하나조차도 섬세한 손길로 다듬어놓은 것을 보다 보면 무척이나 섬세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시된 작품 가운데 가장 시선을 끄는 건 밀라노의 모나리자로 알려진 폴라이우올로의 <바르디 가문 여인의 초상화>다. 이 작품은 마치 펜으로 그린 듯 섬세한 붓터치가 인상적이지만, 핏기 하나 없이 박제처럼 서 있는 여인 때문인지 괜시리 우울해지는 기분이다. 프란체스코 헤이즈의 <자화상>도 매력적이다. 아름다운 누드화와 키스(특히 로미오와 줄리엣)를 소재로 수많은 작품들을 남긴 프란체스코 헤이즈의 <자화상>은 다른 자화상들과는 달리 자신의 친구들을 배경처럼 삽입했다는 점이 큰 매력이다.

폴디 페졸리 미술관을 나와 향한 곳은 현대 밀라노의 자랑거리인 패션 지구다. 수많은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몰려 있는 밀라노 패션 지구는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남다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본 명품은 물론, 브랜드는 낯설지만 눈길을 사로잡는 쇼윈도가 골목마다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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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평일 오후라 그런지 그다지 사람들은 많지 않다. 밀라노 패션 스트리트의 심장부라 불리는 비아 몬테 나폴레오네도 마찬가지다. 파격적인 의상과 널찍한 매장이 도로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매장 안도 밖도 한산하기만 하다. 덕분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 천천히 여유를 부리며 거리를 걷는다.

사실 가장 가고 싶었던 밀라노 두오모는 물론, 밀라노의 자랑거리인 패션 지구까지 둘러봐서인지 마치 해변가에 온 양 마음이 느긋하다. 약간 먼 거리도 굳이 버스나 지하철을 탈 필요를 못 느낀다. 이렇게 걷고 걷다가 어느새 다시 두오모 광장으로 돌아왔다. 하얀 베일에 가려진 두오모는 여전히 나를 설레게 만든다.

무작정 지도를 펴고 다음 행선지를 살피다가 눈에 띄는 이름을 발견한다. 단테 거리. 워낙 거리 이름에 유명 인사의 이름을 붙이는 걸 좋아하는 유럽인지라 지나칠 법도 한데,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인지 괜시리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한다. 단테 거리는 노천 카페와 극장이 즐비해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거리도, 사람들도 모두 반갑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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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끝나는 곳에 카이롤리 역이 떡 하니 버티고 섰다. 이 곳 중앙에는 가리발디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뒤로 성 하나가 시야를 꽉 채운다. 이 곳이 밀라노 최초의 성이자 브라만테와 다빈치의 손으로 다듬어졌다는 스포르체스코 성이다. 벌써 시계가 3시를 넘어서고 있어 서둘러 성으로 향한다. 성 앞의 넓은 보행자 도로인 카스텔로 광장을 지나, 요새처럼 구획화되어 있는 스포르체스코 성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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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대리석 건물들을 많이 봐와서인지, 스포르체스코 성의 붉은 벽돌과 독특한 건축 양식은 조금 낯설다. 마치 중국의 어느 성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정문을 통과해 또 하나의 성채를 지나자, 드디어 5개의 시립 박물관 푯말이 보인다. 모든 박물관을 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듯 싶어 가장 관심을 끄는 고전 예술관으로 들어선다.

고전 예술관에 들어서면 곧바로 14세기의 밀라노 군주인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기마상과 마주친다. 당시만 하더라도 카톨릭의 엄격한 교리가 지켜지던 터라 이러한 동상을 제작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인데, 워낙 밀라노 역사를 좌지우지하던 인물이라 그런지 이렇게 단순하나마 조각상을 남긴 모양이다.

고전 예술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회화 작품도 있지만, 역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장식했다는 아세의 방이다. 마치 담쟁이 덩굴 같기도 하고 울창한 숲 같기도 한 천장이 인상적인 이 방은 울퉁불퉁한 천장 때문에 동굴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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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박물관을 둘러 보기에는 시간이 모자라 욕심을 접고 스포르체스코 성 뒷 편의 샘피오네 공원으로 향한다. 조그마한 연못과 곳곳에 놓여 있는 벤치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곳곳에 피어 있는 꽃과 풀에서 풍기는 향긋한 봄 내음도 기분을 한층 고조시킨다.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나쵸 하나를 집어 들고 공원 나들이에 나선다.

넓은 공원에는 그다지 사람들이 많지 않다. 어린 아이와 나들이에 나온 젊은 엄마, 뭐가 그리 바쁜지 서둘러 걷는 할머니, 피곤한 듯 벤치에 앉아 사과를 베어물고 있는 할아버지가 전부다. 중국 단체 관광객으로 보이는 인파는 스포르체스코 후문 앞에서 연신 셔터만 눌러댈 뿐, 공원으로 들어오진 않는다. 덕분에 느긋하게 쉬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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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도 잠시 날씨가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소나기가 내린다. 키 높은 나무 밑으로 잠시 숨어 기다리는데, 이건 좀처럼 멈출 기미가 안보인다.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슬슬 숙소로 돌아갈 생각으로 정류장을 찾는다.

샘피오네 공원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카도르나 기차역이다. 재미있는 모양의 분수대를 품고 있는 이 기차역은 생각보다 크다. 비록 이슬비로 변하기는 했지만, 비도 피할 겸 기차역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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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램은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금새 도착했다. 트램을 타고 비 오는 밀라노를 배회하는 것도 제법 낭만적이다. 비록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리는 빗방울이 조금만 더 약해질 때까지 시내를 운행해 주기만 하면 된다. 비는 시내가 어두워지고 나서야 그쳤다.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