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밀림이나 아프리카 세랭게티 평원과 같이 자연의 경이를 체험할 수 있는 곳보다는 런던, 뉴욕과 같은 대도시나 로마, 아테네와 같은 문화 유적지에 더 관심이 많은 탓에 아말피 해안은 원래 이번 일정에 없었다. ‘만약 시간이 남는다면’이라는 전제 하에 출국 전 인터넷에서 뒤적여본 적이 있긴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10%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아말피 해안에 들르게 된 건 순전히 이번 여행에서 만난 친구들 덕분이다. 그들이 들려주는 아말피 해안은 그저 해돋이나 구경하는 해안가가 아니라, 바다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행복이 묻어나는 도시였다. ‘바다와 더불어 사는 도시’, 이 말 한 마디만으로도 나의 일정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아말피 해안으로 떠나기 위해 일찍부터 나폴리를 출발한다. 매 20분마다 출발하는 사철은 1시간도 채 안돼 소렌토에 내려준다. 조그마한 시골 역 같은 소렌토 역을 나서자 아말피 여행의 시발점인 SITA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달려가 버스에 오른다. 하지만 오르자마자 난 곧바로 내려야만 했다. 버스 기사는 티켓을 팔지 않았고, 버스 티켓은 기차역 티켓 창구에서 판매하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당황한 듯한 내게 선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줬다는 것이다.
자리는 이미 만석이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스에 올라 숨고르기를 한다. 버스는 시내를 주행하는가 싶더니 곧 해안선 도로를 따라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좌측으로 보이는 소렌토의 멋진 해안선이 벌써부터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버스는 꼬불꼬불한 해안도로를 따라 곡예 하듯 달린다. 버스 우측으로 코발트빛 바다가 스쳐 지나가고, 가끔씩 돌섬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다를 반복한다. 독특한 모양의 다리를 지나면 바다를 향해 머리를 내밀고 있는 나무들이 미풍에 몸을 움추린다. 마치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기막힌 풍경들의 연속이다.
약 40여분간의 숨막히는 여정 끝에 드디어 제법 주택들이 운집돼 있는 포시타노로 접어든다. 바다와 접해 있는 험한 산자락을 따라 새하얀 집들이 조가비처럼 박혀 있고, 이 집들을 따라 연결된 도로는 구름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한 두명 내리기 시작해 드디어 내가 내리기로 결정한 포시타노 해변에 이른다.
하나의 거대한 산 그 자체가 마을이자 건물인 포시타노는 온통 파스텔 톤의 건물들과 새파란 바다로 뒤덮혀 과연 지상낙원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버스 정류장에서 포시타노 해변을 향해 걷는다. 워낙 도시가 고지대에 형성돼 있어 해변가로 가기 위해선 집과 집 사이로 나 있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고 또 내려간다. 해변으로 향하면서 마주친 집들은 사실 아름다운 별장이라기보다는 조금은 낡고 불편해 보이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아침마다 코발트빛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고, 저녁마다 구름 속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을까?
불현듯 뒤돌아 저 멀리 구름에 갇힌 산을 바라본다. 바람에 실려 움직이는 구름 사이로 하얀 집들이 얼핏 얼핏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밑에서 바라보는 포시타노는 위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마치 쌓아서는 안되는 바벨탑처럼 아름답지만 조금은 위태로워보인다.
이국적인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골목을 돌아 짠 내 가득한 해변에 다다른다. 사실 포시타노 해변은 좁고 거친 돌맹이 때문에 해수욕을 즐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안가에는 일광욕과 해수욕을 즐기는 이들로 가득하다.
다들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모습에 긴장이 풀려서일까? 아니면 따뜻한 햇살과 폐부까지 전해지는 짭짤한 바다내음 탓일까? 갑작스레 피곤함과 나른함이 느껴져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해안가에 눕는다. 눈을 감는다. 정말 조용하다. 모처럼 여유를 만끽한다.
문득 아직 아말피행 페리 티켓을 끊지 않았다는 생각에 미친다. SITA 버스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역시 해안선을 감상하기엔 페리가 적격이다. 페리 티켓은 아직 여유가 있다. 게다가 아직 페리가 오기까지 20여분 넘게 남았다.
3가지 맛 젤라띠 컵을 하나 사들고 산책을 즐긴다. 포시타노는 이 곳을 찾는 이들을 위해 무리하게 편의시설을 만들기보다는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태초의 자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자연을 유지하는 길을 선택한 모양이다. 덕분에 편리함은 적지만, 기쁨은 크다. 다시 고개를 돌려 산자락을 바라본다. 예전에 이와 비슷한 유화를 본 적이 있다. 산과 구름과 집, 그리고 바다. 손가락으로 앵글만 잡아도 그림이다.
20여분의 짧은 산책을 마치고 아말피행 페리에 오른다. 지중해를 가르며 조금씩 이동하는 페리에서 바라보는 포시타노는 과연 절경이다. 멀어질수록 가슴이 거세게 요동친다.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 언제고 다시 돌아오리라. 마치 만년설처럼 구름 덮힌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마음속에 다짐해 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해변에서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사람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와버렸다. 집들도 띄엄띄엄 보인다. 이제는 흔적처럼 보이는데도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겠다. 마치 다시는 오지 못할 것처럼 아쉬움도 커져만 간다. 바다도 파랗다 못해 검어졌다.
어느새 아말피가 시야에 들어온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계 10대 낙원 중 하나인 아말피. 바다를 향해 돌출된 육지 위로 장밋빛 지붕을 머금은 새하얀 집들과 그린 듯 하얗게 빛나는 뭉게 구름, 그리고 한없이 파란 바다가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다. 아말피 해변은 바닥이 모두 보일 정도로 맑다. 제법 수심이 깊어 보이는 데도 물고기가 훤히 보인다. 아이들은 방파제에 앉아서 한가로이 낚시를 즐긴다. 생각보다 낚시가 잘 되는지 한 켠에 놓인 수대에 물고기가 가득하다. 시외 버스 정류장과 선착장 바로 옆에 있는 플라비오 지오이아 광장은 아말피 여행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지점이다. 광장 중앙에는 이 곳에 이름을 빌려준 주인공이자, 15세기경 나침반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아말피의 전설적인 항해사 플라비오 지오이아(Flavio Gioia) 동상이 서 있는데, 바다가 아닌 육지를 바라보는 모습이 조금은 생소하다.
인포메이션 센터 찾기가 쉽지 않아 일단 사람들이 붐비는 곳으로 방향을 잡는다. 기념품 가게들을 지나, 노천 카페에서 내놓은 의자와 테이블로 가득한 작은 광장에 이른다. 한 켠에는 분수도 보인다. 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분수물을 마신다. 이 광장 북쪽에는 독특한 모양의 건축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아말피 대성당 혹은 산탄드레아(성 안드레아) 두오모다.
아말피 대성당은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성당들과는 외관부터 다르다. 성당을 둘러싼 아치형 창문과 문양은 로마의 그것이면서도 이슬람 문화를 연상시킨다. 두모오 좌측에 세워진 종탑이 대표적이다. 이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하단)과 이슬람 양식(상단)이 뒤섞여 있는데, 두오모가 아니라 무스크에 가깝다. 건네 받은 성당 브로셔에는 아랍-노먼(Arab-Norman) 양식이라고 기재돼 있는데 생소하기 그지 없다.안으로 들어서면 이러한 느낌은 배가된다. 무어리시 스타일의 독특한 기둥이 인상적인 천국 수도원(The Cloister of Paradise)에는 복도 가득 로마 시대와 중세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전시돼 있고, 예수 수난 바실리카, 산탄드레아 예배당, 그리고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루트에도 화려한 종교품들이 가득하다.
대부분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어 다른 지역의 것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하지만 대성당 내부만큼은 로마의 성당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로지 바로크 스타일로만 장식된 본당은 바로크 특유의 웅장미가 그대로 전해진다.
대성당을 나와 두오모 광장 앞 카페에 앉아 여유로운 오후를 만끽한다. 해변을 따라 걸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당장은 커피가 더 필요했다. 카푸치노 한 잔을 시켜놓고 주위를 둘러본다. 산탄드레아 분수 주위에서 물장난 치는 아이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떠드는 사람들, 아무렇게나 바닥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젊은이들, 모두가 여유로운 모습이다.
슬슬 일어설 때가 됐다. 하루 종일 우왕좌왕하던 하늘이 다시 어두워지고 있다. 기념품 가게 가득 놓인 장식용 항아리도 본채 만채 플라비오 지오이아 광장으로 곧장 향한다. 방금 전 살레르노행 버스가 떠나 20여분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맨 앞 줄에 서서 버스를 기다린다. 그 동안 하늘은 더욱 어두워졌다. 비가 올 모양이다.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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