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들이 개척하고, 로마인들이 향유했던 아름다운 휴양지 ‘나폴리’. ‘나폴리를 보고 죽자’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이탈리아인들이 사랑하는 도시이건만, 내 기억 속 나폴리는 세계 3대 미항의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거리가 먼저 떠오른다.
매일 남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잠깐씩 시내를 둘러본 게 전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폴리가 자랑하는 산타루치아 항구, 움베르토 1세 갤러리와 산 카를로 극장,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피자가게에서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을 만큼의 여유는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늦은 저녁 나폴리의 좁은 골목들을 1시간 넘게 걸어 다니고,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와 조금은 으슥해 보이는 지하철까지 타봤으니, 한 게 전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쩌면 할 건 모두 한 셈이다.
산타루치아 항구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지극히 평범하다. 생각 같아서는 저절로 콧노래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요트, 레스토랑, 호텔 등 여느 항구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해안과 맞닿아 있는 카스텔 델로보마저 없었다면 무심코 지나쳐버렸을 그런 풍경이다. 혹자는 배를 타고 들어올 때 바라보면 ‘세계 3대 미항’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고 하지만, 카프리에서 돌아올 때 시야에 들어온 산타루치아는 여전히 기대에 못미쳤다. 산타루치아보다는 오히려 바로 인근에 있는 움베르토 1세 갤러리와 산 카를로 극장이 훨씬 아름답다. 산타루치아 항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움베르토 1세 갤러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갤러리라는 명성에 걸맞게 화사하고 우아한 느낌이다. 보행통로를 뒤덮고 있는 유리 천장과 그 천장 사이로 비치는 하늘은 고풍스러운 아름다움과 함께 남부 이탈리아만의 정감 어린 미소를 떠오르게 한다.
움베르토 1세 갤러리는 밀라노의 그것과는 달리 쇼핑 지구라기보다는 조그마한 미술관 같은 느낌이다. 물론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아는 그런 거장들의 작품은 없지만, 작고 소탈하며 충분히 능력 있는 이들의 멋진 회화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 내가 이 곳을 찾을 당시에는 원시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는데, 화가도, 작품명도, 그리고 모델도 누구인지 모르지만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움베르토 1세 갤러리 남쪽에 위치한 산 카를로 극장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오페라 극장 답게 인상적인 외관을 자랑한다. 단조로운 아치와 볼트로 마감된 1층과는 달리 2층은 화사한 이오니아식 원주가 길게 늘어서 있는데, 어울리지 않는 듯 하면서도 묘하게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마치 건축학적 오페라를 보는 느낌이다. 비록 이 곳에서 오페라까지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깊은 인상이 남았다.
산 카를로 극장을 지나 극장과 쇼핑가가 어우러진 톨레도 거리를 건너면, 맛있는 음식점과 저렴한 식료품점이 많은 치아이아 거리와 마주치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피자 가게이자, 나폴리의 명물 마르게리타 피자를 발명한 ‘브란디’를 찾아 이 곳까지 왔는데, 저녁 시간이 6시 30분에 시작되는 관계로 예약만 해놓고 인근을 둘러본다. 따닥 따닥 붙어있는 건물들과 지은지 수백년은 됐을 법한 아파트들, 그리고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주민들까지, 오래 전부터 그래왔을 것만 같은 나폴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걸려 있는 빨래줄에는 촌스러운 옷들이 주렁주렁 매어진 채 기울어져가는 태양을 아쉬워하는 모습이다.
이런 골목 사이로 식료품 가게가 길게 늘어서 있다. 소시지, 생선, 치즈, 빵, 과자, 과일 등 다양한 식재료들을 취급하는 가게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과일 가게다. 나폴리는 과일이 제법 싸다. 메론과 체리도 3~4유로 정도면 충분하다. 덕분에 나폴리에서는 제법 과일을 많이 먹었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브란디'로 돌아간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이렇게 찾아준 동양인이 고마워서인지 맞은 편에 위치한 분점 같은 장소로 안내한다. 비슷한 시각에 이 곳을 찾은 몇몇 사람들이 또 다른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는다. 다른 메뉴를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고 이 곳의 명물인 마르게리타 피자와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주문한다.
이 곳의 마르게리타 피자는 정말 감동적이다. 기름기 없는 도우는 물론, 한 입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토마토 소스, 그리고 짜지 않고 쫀득한 치즈까지 지금껏 내가 먹어본 피자 중 단연 으뜸이다. 가격도 1인 기준 5.8유로(약 7천원) 정도에 불과해 큰 부담이 없다. 맛에 감동하고, 친절한 서비스에 감동하며 즐거운 저녁식사를 마친다.
치아이아 거리에서 내가 숙소로 머물고 있는 중앙역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다. 환한 낮이라면 유유자적 산책을 즐겨도 좋으련만, 이미 해는 지고 날씨마저 습해,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야 할 형편이다. 이미 버스는 몇 번 타봤으니 이번엔 지하철을 타기로 맘먹고 지도를 펼쳐본다. 치아이아 거리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은 숙소와 곧바로 연결되는 1호선 톨레도 역이다. 대략적인 위치를 기억하고 걷는다. 텅 빈 거리, 바람에 흩날리는 쓰레기, 하루를 마치고 가판대를 접는 노점상들, 그리고 그들 주위로 가득가득 쌓여가는 쓰레기 더미. 늦은 저녁 마주친 나폴리 시내는 낮보다 훨씬 음산하고 더러우며, 불쾌하다.
길을 잘 못 찾았는지 이리저리 헤매인다. 늦은 저녁 돌아다니는 동양인이 신기한지 흘낏흘낏 훑어보는 시선에 왠지 모를 두려움마저 느끼진다. 다시 지도를 천천히 살펴보고 멀지 않은 곳에 지하철이 있음을 확인한다. 좌측의 푸니콜라레를 지나쳤으니 곧 톨레도 역에 도착하리라.
지하철 역시 시내만큼이나 지저분하다. 역 내에는 언제 청소했는지 궁금할 정도로 오물과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전철이 도착했는데, 겨우 다섯 정거장 거리가 마치 열 정거장도 넘게 느껴진다. 나폴리 중앙역에 내려서야 겨우 안심이 된다.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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