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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Italy)

이탈리아 여행 ⑩ 잃어버린 도시 ‘폼페이’에서의 하루


수비오 화산 폭발로 하루 아침에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폼페이와 관련된 각종 자료집을 읽고 있을 때였다. 나폴리 숙소에서 만난 여행자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은 굳이 돌무더기만 가득한 폼페이에는 갈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괜히 시간 버리고 맘 상하느니,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가서 ‘진짜 볼거리’를 보겠다고 으스댄다.

사실 폼페이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은 그의 말처럼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고스란히 모셔져 있다. 예술적 가치가 충분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는 물론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생활용품과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유물을 망라한다. 바꿔 말하면 폼페이 유적지에서는 이러한 고고학적 유물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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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계획은 전혀 수정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폼페이에 가고 싶은 마음만 더욱 절실해졌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보존 상태가 뛰어난 폼페이 ‘유물’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 폼페이였기 때문이다.

나폴리에서의 첫 날은 무척이나 분주하게 시작됐다. 오후가 되면 폼페이 입장객이 늘어나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어질 것을 감안해, 짐을 풀자마자 서둘러 숙소를 나선다. 다른 여행자들의 충고대로 기차표를 왕복으로 끊고, 다시 한번 폼페이 지도를 훑어본다.

나폴리에서 폼페이 역에서 유적지까지는 금방이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라 미처 도보 루트를 다 그리기도 전에 벌써 폼페이 역에 도착해버렸다. 나머지 루트는 걸으면서 살펴보기로 하고 서둘러 유적지로 향한다.

조금은 현대적인 느낌의 출입구를 지나자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다. 아줌마, 아저씨로 구성된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도 있었는데 전혀 개의치 않고 첫 번째 관문인 포르타 마리나에 다가선다. 포르타 마리나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건 붉은 그물망과 그 안에서 열심히 흙을 파내고 있는 발굴단이다. 1860년 고고학자 피올렐리 교수가 시작한 이래 1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발굴 작업이 계속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써부터 가슴이 요동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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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현장 맞은 편에는 드디어 폼페이 답사의 시작을 알리는 교외 온천탕 ‘Terme Suburbane'이 자리 잡고 있다. 워낙 목욕을 좋아했던 로마인이었던 만큼 조그마한 휴양도시 폼페이에도 이렇게 온천탕이 있다는 사실이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아쉽게도 보존 상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을씨년스러운 원주만이 이 곳을 기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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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타 마리나를 통과하면 반듯한 직선 도로가 펼쳐지는데, 이 도로가 바로 잃어버린 도시 폼페이와 마주치는 첫 번째 도로인 마리나 도로(Via Marina)다. 서기 79년 이전에 만들어진 도로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그저 캄파냐 지방의 소도시인 폼페이에까지 이 정도의 도로망을 구축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전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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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 도로 동쪽에 위치한 바실리카는 전형적인 로마 건축물답게 중앙의 넓은 홀과 장식미가 짙게 풍기는 열주를 자랑한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건 원주들이 화려한 대리석이 아닌 붉은 벽돌로 채워졌다는 사실이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조금 걷다보면 폼페이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중앙 광장(Foro)에 도착한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널찍한 공터에 불과하지만, 주위에 모여 있는 신전들과 바실리카, 그리고 시장 건물이 이 곳이 과거 종교, 정치, 상업의 중심지였음을 대변한다.

로마 최고의 신 유피테르(제우스)에게 봉헌된 유피테르 신전은 중앙 광장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폼페이에 온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신전은 광장 남서쪽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이지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신전은 역시 유피테르 신전이다. 보존 상태가 뛰어나서라기 보다는 서기 79년 8월 24일,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오늘날의 에르콜라노)을 비롯해 나폴리 만 동부 해안 일대의 풍요로운 도시들을 집어삼키고, 사망자만 5천명에 달하는 재앙을 불러일으킨 베수비오 화산이 바로 유피테르 신전의 등 뒤에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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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광장의 동쪽에도 2개의 신전이 더 있다. 네로의 자살 이후 혼란한 로마 정국을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기리는 신전(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대이니만큼 그의 동상이 이런 소도시에도 세워졌을 것이다)과 라리 푸블리치 신전은 겨우 건물터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도 파손 정도가 심하지만, 그래도 과거에는 이 곳 폼페이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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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피테르 신전과 마주한 자리에 있는 민회(Edifici Amministrazione Pubblica)는 폼페이의 로마 시민권자들이 주요 관리들을 선출하던 곳이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의 황제들이 민회의 우두머리인 호민관까지 겸임함으로써 민회의 거부권마저 제거해버렸지만, 로마 시대(특히 공화정)에서 민회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중앙 광장의 동쪽 끝자락에 세워진 건물은 여사제의 옷을 세탁하고, 염색하는 장소이자, 옷감(특히 양모)을 사고 파는 폼페이의 옷감 시장인 ‘에우마키아 기념 건물(Edificio di Eumachia)’ 터다. 이 곳 역시 아쉽게도 지금은 원형이 거의 남지 않고, 꽃과 새로 장식된 입구 정면의 부조 기둥만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핵심 건물들이 밀집돼 있는 중앙 광장을 벗어나면 폼페이 남부를 가로지르는 아본단자 가도(Via dell' Abbondanza)와 마주친다. 아본단자 가도는 폼페이의 심장부인 중앙광장은 물론, 각종 상가와 외곽 주택가, 그리고 저 멀리 원형경기장까지 이어져 폼페이 유적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로로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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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본단자 가도는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기에 그만인 곳이다. 넓기도 넓거니와 보존 상태도 우수해 정말 걷다 보면 역사의 한 순간을 걷고 있는 기분마저 든다. 특히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볼거리가 밀집돼 있는 서쪽과 남쪽으로 몰려 다니기 때문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아본단자 가도에는 관광객들도 많지 않다.

유유자적 햇볕을 즐기며 아본단자 가도를 걷는다. 일정 간격으로 등장하는 샘터가 눈을 즐겁게 만드는 가운데, 가끔 가도를 가로지르는 큼지막한 돌들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위치나 크기로 짐작컨대 손수레의 진입을 막기 위한 게 아니면, 걷다가 지쳐 잠시 쉬어가는 벤치가 아닐까 추정한다.

그러나 이 돌들은 의외로 징검다리 용도라고 한다. 보통 로마의 가도는 배수가 잘 되도록 애초 설계부터 땅을 깊게 파고 그 위에 자갈과 모래를 적절하게 배합한다. 즉 배수 시설이 잘 돼 있어 가도에 별도의 징검다리를 놓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징검다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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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설명을 마친 현지 가이드에게 염치를 불구하고 묻는다. 자신이 맡은 단체 관광객도 아니면서 엿들은 게 얄미울 수도 있건만(실제로 일부 한국인 가이드는 대놓고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 가이드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간혹 배수가 잘 안될 경우를 대비해 인도와 인도를 잇는 징검다리를 만들어놓았다고.

조금은 머쓱한 웃음과 고맙다는 인사를 마치고 계속해서 아본단자 가도를 걷는다. 폼페이는 작은 휴양도시치고는 제법 부유층이 많이 살았던 모양이다. 중앙광장에서 원형경기장 부근까지 이어지는 아본단자 가도 주위에는 넓은 거실과 안뜰, 심지어는 연못까지 있는 집들도 적지 않다. 개방적인 성격의 로마인답지 않게 제법 높은 담벽이 둘러져 있는 점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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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주택만큼은 아니어도 로마 시대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상점들이나 공공 건물들도 자주 눈에 띈다. 아본단자 가도 중간쯤에 위치한 풀로니카 스테파누스(La Fullonica Di Stephanus)도 그 중 하나다. 이 곳은 빨래를 하기 위한 공동 세탁장이다. 그러나 세탁장이라고 해서 우물 하나 달랑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공공 건물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로마인답게, 적지 않은 프레스코화를 전시해 놓아 마치 살롱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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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본단자 가도가 끝날 즈음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폼페이 정문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원형경기장이 보인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곳곳에서 심심찮게 봐와서인지 별다른 감흥은 없다. 다만 다른 곳들과는 달리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입구로 다가선다.

폼페이의 원형경기장도 그리 양호하지만은 않다. 무성하게 나 있는 잡초는 마치 버려진 유적지 같은 분위기다. 잠시 객석에 앉아 경기장을 둘러본다. 언젠가 검투사들의 검 부딪히는 소리로 시끄러웠을 이 곳은 이제 몇몇 시끄러운 관광객들의 웃음소리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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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경기장 앞에는 높다란 소나무들이 근사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과거 검투사들이 묵던 막사인 팔레스트라 그란데(Palestra Grande)에 도착한다. 폼페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여겨지는 이 곳은 아쉽게도 입장이 금지돼 있다. 그래도 워낙 넓다 보니 틈새로 내부를 살펴볼 수 있는데, 사각의 벽을 따라 제법 반듯한 원주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사실 팔레스트라 그란데보다는 근처의 비너스의 집(Casa della Venere in Conchiglia)이나 옥타비오 콰르티오(Casa di Octavio Quartio)의 집이 내용과 보존 상태에서 더 낫다. 폼페이 시민들이 가장 숭배했다는 비너스 벽화가 그려진 비너스의 집은 팔레스트라 그란데 바로 옆에 있다. 비너스의 집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조그마한 정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집의 유래가 된 비너스 벽화는 바로 이 정원 뒷편에 있다. 사실 색이나 표현력에 있어서는 그다지 눈길을 끄는 작품은 아니다. 정원의 또 다른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정원 벽화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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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실망해서는 안된다. 비너스의 집의 진정한 가치는 겨우 벽화 몇 점과 제법 멀쩡한 원주 몇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문으로 이어지는 넓은 거실, 안쪽으로 연결되는 작은 정원과 분수, 이 정원을 감싸고 있는 벽화와 균형미가 돋보이는 도리스식 원주는 1세기 로마 제국의 개인 주택의 전형을 보여준다. 폼페이가 화산재에 묻히지 않았다면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어찌 꿈이나 꿀 수 있었을까?

비너스의 집 바로 옆에 위치한 옥타비오 콰르티오의 집도 거의 유사한 구조지만, 한 가지 다른 건 정원이 꽤 넓다는 사실이다. 이 정원 중앙에는 분수로 사용됐을 터와 시설이 여전히 남아있어 낭만을 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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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원주만 가지런히 놓여있는 유럽 배의 집을 지나 카스트리치오 가도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폼페이 대극장에 다다랐다. 5천명을 수용했다는 대극장은 대리석으로 포장된 귀빈석(무대 근처)과 앙상한 철골만 남은 일반석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직접 객석에 올라본다. 예전엔 이 곳도 연극을 즐기려는 폼페이 시민들로 가득 찼을텐데, 지금은 마치 녹차밭처럼 잡초만 무성하다.

대극장을 나와 폼페이 답사의 하이라이트로 불리는 북서쪽으로 향한다. 폼페이에서 가장 완벽하게 복원된 집으로 꼽히는 베티의 집이 첫 번째 목적지다. 아본단자 거리에서 방향을 다잡고 북쪽으로 걷는다. 하지만 몇 분 걷지 않아 멈춰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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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나 많은 인파가 운집해 있는지 도무지 틈을 찾기가 힘들다. 독일인 단체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느라 정신이 없다. 지도를 펴들고 위치를 확인한다. 이 곳은 야한 프레스코가 전시돼 있는 선술집(Lupanare). 그러니까 폼페이 답사에서 일종의 기분전환(?) 장소인 셈이다.

기다란 줄을 마다 않고 뒤로 가서 순서를 기다린다. 5분 넘게 기다린 끝에 들어선 선술집은 어둡고 좁다. 나가는 입구 즈음에 걸려 있는 두 장의 프레스코는 마치 어릴 적 화장실에서 본 듯한 그림처럼 조잡하다. 어설픈 스케치만큼이나 채색도 형편없다. 게다가 보존 상태도 좋지 않아 금방이라도 페인트가 떨어질 것만 같다.

괜한 걸음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원래 가던 길로 되돌아간다. 분명 지도를 펼쳐 들고 걸었건만 어느 지점에선가 비슷한 지점을 계속해서 돌고 있다. 몇몇 관광객들에게 베티의 집을 물었지만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다. 잠시 다리도 쉴 겸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는 주택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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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중앙에 커다란 채광창이 있는 이 곳은 곰의 집(Casa dell'Orso)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어딘가 곰과 관련된 벽화가 있을 게 분명하지만 좀처럼 찾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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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정밀하게 세공된 모자이크화와 여타 주택에서는 찾기 힘든 독특한 주택 구조를 천천히 둘러본다. 모데스토 가도를 따라 걷는데 커다란 돌항아리가 시선을 끈다. 대여섯개의 돌항아리가 일렬로 놓여진 이 곳은 과거 빵을 팔던 제과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가이드북에서 본 적이 있는 정원에 도착했다. 책을 뒤적거려 이 곳이 바로 목신의 집이라는 사실을 찾아낸다. 폼페이 귀족 저택의 화려함을 보여준다는 가이드북의 설명처럼 아담한 크기의 관목림과 우아한 분수, 통로와 정원을 구분 짓는 열주, 바닥을 뒤덮고 있는 모자이크, 그리고 중앙홀에 놓인 목신(Faun) 청동상이 지금까지 둘러본 주택들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베티의 집은 목신의 집 북동쪽 첫 번째 집이다. 가지런한 원주로 둘러싸인 아담한 정원과 집 중앙에 시원하게 뚫린 채광창, 오밀조밀 구분돼 있는 방들까지 확실히 복원 정도가 다른 느낌이다. 그러나 정작 이 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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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이런 세부 요소보다 집 앞에 그려진 프레스코에만 관심을 보인다. 자신의 성기를 저울로 재고 있는 남자가 새겨진 이 프레스코화는 선술집에 비해 선명도도 훨씬 뛰어나다. 원래 악귀를 쫓으려는 의도였다고 하는데 그 의도와는 달리 시끄러운 관광객들을 불러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베티의 집에서 폼페이 북서쪽에 위치한 에르꼴라노 문까지는 멀지 않다. 대부분의 폼페이 유물들이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으로 옮겨진 것과 달리 에르꼴라노 문 뒤편의 미스테리 집에는 제법 생생한 프레스코 10여점이 그대로 놓여져 있다고 한다. 사실 맘만 먹으로 이 곳까지 둘러볼 수 있었지만,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어서인지 슬슬 나폴리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결국 미스터리 하우스는 포기하고 대신 돌아가는 길에 있는 중앙 광장 욕장을 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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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 델레 테르메와 비아 델포로 교차점에 있는 중앙 광장 욕장은 폼페이의 3개 목욕탕 가운데 하나로, 그 중 가장 완벽하게 남아있는 목욕탕이다. 천장에 새겨진 조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증기 목욕실, 태양의 빛을 이용한 채광 시설이 매력적인 온탕 목욕실, 지금 사용해도 별 무리가 없어보이는 온수 급수대 등 하나 하나 둘러보는 과정까지도 무척 즐겁다.

중앙 광장 서편을 따라 입구로 나오는 길에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유물들이 쌓여 있는 광장 저장고(Forum Granary)를 지나친다. 이 곳에서는 공포에 질려 엎드려 있는 사람의 석고상이 눈길을 끈다. 화산재에 덮인 채 고열로 순식간에 녹아버린 당시 주민이라는 사실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등뒤로 보이는 베수비오 화산은 저렇게 평화롭기만 한데, 2,000여년 가까이 두꺼운 화산재에 묻혀있던 폼페이는 아직도 할 말이 많은 것만 같다. 기차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마지막에 보았던 석고상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