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족에 쫓겨 바다 위에 나무판과 기둥을 설치하고 주거지를 짓기 시작해 지금은 118개의 섬이 150여개의 운하와 400여개의 다리로 연결된 ‘베네치아’. 매년 2월 개최되는 카니발과 늦여름에 열리는 국제 영화제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내게 있어 베네치아는 1,500여년 전부터 시작된 비잔틴 문화를 여전히 간직한 채 바다 위에 요새처럼 떠 있는 ‘물의 도시’ 바로 그것이다.
내가 베네치아를 찾은 건 따사로운 봄볕이 막 쏟아지던 5월이다. 밀라노에서 아침 6시 55분발 기차를 탄 덕분에 오전 9시 30분경 베네치아 산타 루치아 역에 내릴 수 있었다. 비가 올 거라는 기상 예보와는 달리 맑은 하늘이다. 배포용 여행자 지도도 구하고, 유럽 여행 중인 후배도 만날 겸(기차역에서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약속한 터였다) 역내에 위치한 여행 안내소에 줄을 선다.
비록 여행자 지도는 유료라 포기했지만, 다행히 후배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기차역 앞 계단에 앉아 그 동안의 여행담을 듣는다. 다만 나의 베네치아 일정이 겨우 하루뿐인지라 조금은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야만 했다.
혼자 하는 여행과 둘 혹은 서넛이서 다니는 여행은 분명 차이가 있다. 겨우 하루뿐인 동행이라 할 지라도 자칫 서로의 여행을 망칠 수 있는 만큼 신중한 접근은 필수다. 다행히도 후배는 모든 일정을 내게 맡겼다. 가고 싶은 대로 움직이고, 쉬고 싶은 곳에서 쉬면 되는 것이다. 베네치아 시내를 온종일 걷겠노라고 생각하던 내게는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미로 같은 운하길을 걷기 이전에 그 유명한 카날 그란데(대운하)를 먼저 체험키로 했다. 베네치아의 주요 볼거리가 대부분 이 곳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어, 그저 지나는 것만으로도 베네치아 여행은 사실상 오부능선을 넘는 셈이다.
카날 그란데 체험에 가장 유용한 교통 수단은 수상 버스인 바포레토다. S자형의 카날 그란데(대운하)에 늘어선 모든 정류장에 정차하며 유유자적 물살을 헤치는 바포레토는 여유를 즐기며 베네치아를 둘러보기에 그만이다. 야외 공간이 좁고, 안내 방송이 없어 쉴 새 없이 두리번거려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고색창연한 도시를 둘러보는 프리미엄이라 생각하면 마냥 즐겁다.
카날 그란데의 종착역이자 베네치아 여행의 출발지로 손꼽히는 산 마르코 광장은 과연 베네치아가 자랑하는 최대 문화 유산다웠다. 비잔틴 성당의 화신으로 불리는 산 마르코 대성당, 놀라운 세공술을 자랑하는 두칼레 궁전, 그리고 베네치아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대종루가 모여 있는 이 곳은 두칼레 궁전 옆으로 들어서는 입구를 제외하고는 사방이 열주로 막혀 있어 마치 그리스의 스칼라를 연상시킨다.
언제나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는 산 마르코 광장은 과연 앞으로 나가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인산인해다. 산 마르코 대성당 앞에서 진행되던 행사가 끝나고서야 겨우 정체가 풀렸는데, 그것도 잠시일 뿐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하다. 빽빽하게 뭉쳐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산 마르코 대성당으로 들어선다.
둥글고 작은 돔과 종탑, 금빛으로 빛나는 모자이크로 치장된 산 마르코 대성당은 과연 명불허전이다. 밀라노 두오모를 바라보며 이토록 화려한 건축물이 있을까 했는데, 산 마르코 대성당도 결코 밀라노 대성당에 못지 않았다. 탄성을 자아내는 화려한 부조들은 물론이고,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 모자이크와 이국적인 느낌의 돔까지 정말 볼수록 장관이다.
두칼레 궁전도 얼핏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복층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좀 더 자세히 다가가면 순백의 아케이드와 흰색과 분홍색 대리석이 기하학적 무늬를 자랑하는 외관이 호기심을 자아낸다. 다만 어찌나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섰던지 들어가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사실 산 마르코 광장의 하이라이트는 대종루다. 바로 베네치아의 멋진 풍경을 고스란히 가슴 속에 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방금 전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던 산 마르코 대성당도 대종루에서 보는 모습이 훨씬 감동적이다. 약간은 모양이 길쭉한 중앙 돔을 중심으로 4개의 같은 모양의 돔이 정십자가 모양을 형성하고 있는 모습은 비잔틴 문화의 정수를 그대로 보여준다.
베네치아의 시가지는 분명 피렌체의 그것과 닮았지만 달랐다. 마치 바닷가의 짭짤한 분위기라고나 할까. 어느 곳을 바라봐도 아름답지만, 역시 베네치아라는 도시는 물이 있어야 한층 아름답다. 활시위처럼 휘어진 선착장이 위치한 동쪽과 섬들로 가득한 남쪽에 유독 눈이 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대종루를 내려와 두칼레 궁전 바로 뒤에 위치한 탄식의 다리로 향한다. 이 곳은 베네치아에서 리알토 다리만큼이나 유명한 곳이다. 프리지오니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는 죄수들이 이 다리를 건너면서 한숨을 쉬었다는 데에서 유래됐다는데, 그 유명한 카사노바도 이 다리를 건너 지하 감옥에 수감됐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산 마르코 광장만큼이나 관광객들로 붐빈다. 사람들을 헤집고 널찍한 광장으로 돌아와 드디어 본격적인 운하 탐방을 시작한다. 베네치아는 무척이나 좁고 복잡하다. 지도를 갖고 다녀도 좀처럼 쉽게 길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좁은 골목들을 누비고 다니는 것도 베네치아 여행이 주는 묘미다.
베네치아는 과연 물의 도시답게 사방에 운하가 가득하다. 그리고 그 운하마다 마치 자가용처럼 곤돌라가 잔뜩 매어져 있다. 대부분의 곤돌라는 까만 색의 단조로운 모습이지만, 가끔 사치스럽게 치장된 곤돌라도 눈에 띈다. 사실 곤돌라를 타고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도시를 둘러보는 낭만은 베네치아라는 도시가 주는 선물이다. 비록 비싸서 곤돌라를 타보진 못했지만, 곤돌라를 타는 이들의 행복한 표정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골목 가득 늘어선 가게들은 대부분 가면과 유리 공예품으로 채워져 있다. 현란한 색채와 정교한 이음새가 자랑인 베네치아의 가면과 과연 유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정교한 유리 제품들을 보다 보면 이탈리아인들이야말로 진정 손재주가 뛰어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리예술가들도 심심찮게 만난다. 산 모세 성당을 지나 아카데미아 갤러리로 향하던 중 명품 쇼핑가 한 켠에서 시선을 확 사로잡는 거리예술가를 만났다. 하얀색 페인트로 온몸을 칠하고 동상처럼 서 있는 것까지는 별반 새로운 게 없지만, 익살스런 표정과 행동으로 계속해서 관객들과 소통한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프로였다.이렇게 걷고 또 걷다 보니 벌써 아카데미아 다리에 이르렀다. 원래 베네치아에서는 어느 박물관도 들어갈 계획이 없었지만,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을 놓친 게 못내 아쉬워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품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잡기로 했다.
아카데미아 갤러리에는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들이 작품이 굉장히 많다. 워낙 다작을 그려낸 이들이라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지에 작품들이 흩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을 꽉 채울 정도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화가는 틴토레토다.
매너리즘 시기를 대표하는 이 화가의 역동적인 필체를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심박수가 정상을 넘어선다. 하물며 직접 두 눈으로 본다면야. 방들이 너무 넓어 조금은 휑한 느낌마저 드는 갤러리 안에서 틴토레토의 <성 마르코의 유체를 옮겨옴(The Stealing of the Dead Body of St Mark. 1566년)>과 같은 작품을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만 이리 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바라보게 된다.조명의 각도에 따라, 보는 위치에 따라 느낌이 다른 이 작품을 보며 비록 옆방에 있는 티치아노의 작품처럼 색과 구도의 미학을 보여주진 못해도 강렬한 느낌을 주는 매너리즘 시대의 작품에 또 한번 감탄한다.
갤러리를 나와 잠시 다리 위에 서본다. 카날 그란데를 잇는 3개의 다리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한 아카데미아 다리에서 바라본 카날 그란데는 정말 낭만적이다. 여기 저기 운하에서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곤돌라도, 공사 중이라며 두터운 천막을 걸치고 있는 건물들도,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워 애써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드는 관광객들도 모두 근사한 풍경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다시 걷는다. 카날 그란데를 따라 길이 있으면 그 길을 따라, 길이 없으면 골목으로 들어선다. 굳이 지도를 펴고 싶지 않다. 다만 중간 기착지로 결정한 리알토 다리를 찾기 위해 가끔 이정표를 살펴본다.
카날 그란데의 중앙 부분을 관통하는 리알토 다리는 베네치아를 찾은 이들이 자의든 타의든 반드시 한번쯤은 지나쳐가는 곳 중 하나다. 딱히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베네치안들은 카날 그란데를 처음으로 이은 이 다리를 베네치아의 명물로 꼽는다고 한다.
리알토 다리에서 본 카날 그란데는 아카데미아 다리에서의 그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유난히 선박장도 많고 유난히 배들도 많아 조금은 어수선한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이곳 리알토 다리에서 바라본 베네치아는 유난히 더 이국적이다. 소금기 가득한 어시장을 지나 바포레토에 앉아 스치듯 지나친 카 도로를 찾아간다. 안타깝게도 베네치아에서 가장 세련된 건물로 꼽히는 카 도로는 공사중이었다. 내부 구조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다지 간절하지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애초에 마음 먹은 것처럼 다시 운하를 따라 산책한다. 다만 이번엔 성당들을 찾아본다. 사실 유럽 성당들이야말로 진정한 문화 유산들이다. 건축적 아름다움은 물론, 소장된 조각들과 회화 작품들도 당 시대 최고의 것들이다. 아무리 많은 성당들을 봐왔다 할지라도 또 다른 도시에 가면 그 곳의 성당을 들어가봐야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산 지아코모 달로리오 성당은 골목을 누비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아쉽게도 이미 문을 닫은 상태라 내부를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본당과 종탑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베네치안-비잔틴 양식에서 르네상스의 정신이 묻어난다.
바로크 양식의 화려함과 당당함이 느껴지는 산타 마리아 디 나자렛 성당, 건물은 작지만 밝은 초록색 돔 때문에 유독 눈에 띄는 산 시메오네 피콜로 성당을 지나 드디어 카날 그란데 최 북단에 위치한 스칼치 다리에 도착했다.
스칼치 다리에서 카날 그란데를 내려다 본다. 해가 뉘엿 뉘엿 넘어가면서 운하가 한 낮보다 더 환하게 빛난다. 이 곳을 끝으로 베네치아 도보 여행을 마치기로 결정해서인지 마음은 더욱 여유롭다. 지친 다리도 쉬고, 노천 카페의 낭만도 즐길 겸 괜찮은 레스토랑을 찾아 자리를 잡는다.
점심에 이어 저녁도 이탈리아 정통 요리다. 비록 높은 가격 때문에 풀 코스를 시키지는 못했지만, 제법 맛있어 보이는 피자와 시원한 맥주를 시키고 나니 왠지 모르게 뿌듯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비가 올 것만 같던 하늘이 결국엔 소나기를 퍼붓는다. 식당도, 거리도 어수선해진다. 베네치아에도 어둠이 내린다.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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