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위대한 예술가들의 고향 피렌체. 도시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라 불리는 이 곳에 도착한 시각은 여행을 시작한 지 4일째 되던 날 오전 10시경이었다. 이탈리아를 다녀온 이들이 하나같이 반드시 여행 일정에 넣어야 한다며 간섭할 때만 하더라도 스페인 똘레도처럼 그저 ‘역사적 가치’ 때문이라고 단정했었다. 하지만 기차역에 내리는 순간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첫 여정을 시작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지금껏 봐왔던 성당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울퉁불퉁한 외관을 대패로 깎아놓은 듯 평면적인 느낌의 이 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도미니코회의 성당이라는 부가 설명과는 달리, 성당 정면에 장식된 흰색과 녹색 대리석 때문인지 르네상스의 기운이 더 짙게 느껴진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면 고딕 양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층 얇아지고 세련된 기둥과 기둥 사이를 장식하고 있는 대형 스테인글래스가 대표적이다. 비록 이 날은 햇볕이 강하지 않아 스테인글래스의 강렬한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부족했지만, 그래도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은 여전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역시나 최초의 원근법이 적용됐다는 마사치오의 <성 삼위일체>다. 그 때문인지 이 성당은 입장료를 별도로 받고 있었는데, 바티칸 박물관에서 워낙 대단한 작품들을 봐서인지 그다지 감흥이 살아나진 않았다. 오히려 이 작품보다는 화려한 프레스코가 인상적인 스트로치 예배당에 더 눈길이 갔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산 로렌초 성당은 초기 르네상스 건축의 대가로 알려진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성당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외관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브루넬레스키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아직까지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당 내부는 외관과는 달리 르네상스 건축의 묘미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조화롭게 배치돼 있는 원주, 조각, 천장과 바닥의 문양, 그리고 바실리카 원형을 닮은 성당 구조에 이르기까지 역시 로마에서 본 성당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산 로렌초 성당 마지막 두 기둥 사이에 마주보고 서 있는 <설교단>(도나텔로 작)과 <수태고지>(필리포 리피 作)다. 특히 <수태고지>는 르네상스 회화 작품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원근법이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어 눈길을 끈다. 워낙 회화의 주제로 많이 사용된 내용이지만, 사실적인 표현력 때문에 그 느낌이 새롭다.
산 로렌초 성당 근처에는 마치 남대문 시장과 같은 시장이 기다랗게 형성돼 있다. 대부분 가죽 제품들인데, 패션에 일가견이 있는 이탈리아답게 길거리 제품임에도 명품 못지 않은 세련미를 자랑한다. 가죽 시장 사이에 있는 둔탁한 느낌의 메디치가 예배당을 지나 천천히 걷다보면 피렌체의 심장부인 두오모를 만나게 된다. 피렌체 두오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왜 꽃의 성모 마리아 두오모라고 부르는지, 직접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세례당과 조토의 종탑 뒤로 눈부시게 빛나는 두오모는 아치 상단 부분을 위로 끌어올려 웅장함을 강조하려던 고딕 양식이 흰색, 분홍색, 녹색 대리석과 어울려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화려한 외관에 압도당한 채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이 다가가 성당 바로 아래 서자, 이것은 건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것 하나 그냥 새겨 넣은 것 없이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정말 왜 그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두오모를 찬양하는지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전망대에 올라가기 전에 우선 성당을 한 바퀴 돌기로 작정했다. 장밋빛 돔과 형형색색의 화려한 대리석 장식들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두오모의 벽을 채우고 있는 대리석들은 비록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이물질이 많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살펴보면 그 영롱함만은 여전하다. 두오모의 남쪽 벽 맞은 편에는 두오모의 돔을 만든 브르넬레스키의 동상이 있다. 컴퍼스를 들고 있는 조각상의 시선은 정확히 자신의 작품인 돔 위에 꽂혀 미소를 자아낸다.
사실 피렌체를 찾은 결정적인 이유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쥰세이와 아오이가 그토록 가고자 했던 전망대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성당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곧바로 전망대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또 다시 좁은 계단을 따라 도착한 두오모 전망대. 마치 만원 버스를 탄 듯 피곤하고 힘든 길이었지만, 이 곳에서 바라본 피렌체 시가지는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다웠다.“피렌체에 있는 두오모 대성당은 연인들의 성지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 서른 번 째 생일날, 나와 함께 거기 가줄 거지?”
쥰세이와 아오이의 기억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피렌체. 모든 지붕이 두오모를 닮은 장빗빛이어서인지 르네상스 시대의 한 시점에 잠시 내려선 느낌이다. 두오모를 장식하고 있는 각종 대리석의 색깔처럼 피렌체는 풀내음 가득한 초록빛, 따뜻한 태양빛이 담긴 하얀 벽, 그리고 분홍빛보다는 조금 진하지만 한없이 화사한 느낌의 장밋빛을 머금고 있었다.
잠시 낮잠이라도 자고픈 충동을 간신히 누르고 전망대를 내려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당답게 두오모 내부는 무척이나 넓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됐다는 안내글처럼 곳곳에 마리아를 기념하는 장식들이 배치돼 있다. 화사함보다는 깊이 있는 숭고함이 느껴지는 프레스코화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예상보다 두오모에 오래 머무른 덕분에 오후부터는 좀 더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시뇨리아 광장에서 또 다시 예상 시간을 훨씬 초과하고 말았다. 시뇨리아 광장은 아름다운 조각들과 수려한 분수가 조화를 이루는 야외 박물관이다.
광장 우측의 로지아에는 잠볼로냐의 <사비니 여인의 납치>, 첼리니의 <페르세우스>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 조각 작품들이 전시돼 있고, 광장 북서쪽에는 님프와 바다의 신 넵튠이 어우러진 <넵튠분수>가 서있다.
특히 광장 북쪽에는 피렌체의 상징인 다비드 상이 세워져 있다. 비록 모작이라지만(진품은 아카데이마 갤러리에 있음) 미켈란젤로의 고향에서 마주친 다비드는 더욱 당당한 모습이다.
시뇨리아 광장은 그 자체로서도 매력적이지만, 피렌체의 자랑거리인 우피치 미술관과 바르젤로 미술관, 베키오 궁전을 이어주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불행히도 난 월요일에 피렌체에 머물게 돼서 우피치 미술관과 바르젤로 미술관, 그리고 아카데미아 갤러리는 모두 포기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베키오 궁전은 월요일에도 개관한다는 사실이다.망설임 없이 베키오 궁전에 들어섰다. 둔탁하고 무거운 느낌의 중세 고딕양식 외관과는 달리 건물 내부는 궁전이라는 말에 걸맞는 화려한 장식들로 꾸며진 방들이 무수히 많다. 가장 먼저 들어서게 되는 500인실은 화려한 천장과 거대한 프레스코화 때문에 마치 화려한 보석 상자 안에 들어선 기분이다.
그러나 프레스코화에 새겨진 내용(안내 브로셔에는 이 작품들이 모두 시에나와 피사간의 전투 장면을 묘사했다고 적혀 있었다)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큰 감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500인실의 필수 관람요소라는 미켈란젤로의 <승리> 역시 미완성작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냥 지나쳐버렸을 정도로 동작과 표정이 어색하기만 하다.
베키오 궁전은 여타 박물관이나 미술관처럼 친절하게 동선을 그려주지 않기 때문에 중간 중간 안내판을 살펴봐야만 모든 방들을 살펴볼 수 있다.
그 중 사방 어디에도 창이 없어 어둡지만 매너리즘 화가들의 프레스코화가 가득한 프란체스코 1세의 서재, 브론치노의 <모세 이야기>와 <수태고지>가 진열된 엘레오놀라 예배당, 그리고 베키오 궁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인 백합실은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곳이다.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여타 방들과는 달리 생생함과 활기가 느껴지는 백합실은 천장의 황금빛 백합이 인상적이다. 황금색과 푸른색의 격자 무늬 천장은 마이아노의 작품인데, 이는 당시 피렌체 공화국과 친선 조약을 맺은 프랑스 왕의 문장을 새겨 넣은 것이라고 한다.
베키오 궁전을 나와 잠시 로지아에 머물다 천천히 베키오 다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어야 할 우피치 미술관은 휴관이라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덕분에 우피치 미술관 앞길 기둥마다 세워진 예술가들의 조각상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가장 눈길을 끌었던 조각은 지오반니 보카치오다. 단테, 페트라르카와 함께 이탈리아 최대 문학자로 꼽히는 <데카메론>의 저자인 지오반니 보카치오. 그가 살던 14세기 복식 차림이어서인지 조금은 낯설지만, 당당하고 늠름한 풍채가 그의 작품만큼이나 우직해 보인다.
우피치 미술관에서 베키오 다리까지는 기껏해야 2분 정도밖에 안걸리지만 느긋하게 이것저것 둘러보며 걸어서인지(아르노 강 북쪽에서 조정 경기를 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베키오 다리에 도착했다.
도시 미관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아르노 강 다리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곳이 바로 이 곳 베키오 다리다. 피렌체의 다리들 중 가장 오래된 이 다리는 2차 세계 대전 중에도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아 여전히 피렌체의 상징물처럼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원래 푸줏간, 가죽 처리장, 대장간 등이 들어서 있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베키오 다리에는 온통 보석 가게들뿐이다. 마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형세, 골동품들을 모아서 엮어 놓은 듯한 상점 내부, 그리고 낡은 인테리어 때문에 그냥 지나칠 것 같지만, 오히려 이런 모습들이 신뢰를 주는지 가게마다 관광객들이 즐비하다.
베키오 다리는 다리 위에 세워진 보석 가게들이 시선을 막아 다리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다리 중앙에 있는 세 개의 아치가 겨우 이 곳이 다리라는 사실을 각인시킬 뿐이다.
베키오 다리에서 바라본 아르노 강은 기대만큼 낭만적이지는 않지만(피렌체 시내를 관통하는 아르노 강은 한강만큼이나 탁하다), 가쁘게 걸어온 발걸음을 늦출 만큼의 여유로움은 충분하다.
베키오 다리에서 피터 궁전까지는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비록 휴관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내를 좀 더 둘러볼 겸 천천히 좁고 좁은 골목을 걸어 피터 궁전으로 향했다.
라파엘로의 <대공의 성모>와 티치아노의 <막달라 마리아>가 전시된 팔라티나 미술관을 비롯해, 은세공품 박물관, 메디치 왕실 아파트, 근대 미술 갤러리, 의상 갤러리, 도자기 박물관 등 6개의 박물관이 있는 피터 궁전은 우피치 미술관만큼이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러나 이 날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연인들이 비둘기와 함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사실 로마부터 이어진 강행군으로 이쯤해서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피렌체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된다는 ‘석양’을 보기 위해 몇 시간 더 시내를 서성거릴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피렌체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하기 전 프란체스코 최대의 성당이자,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오와 같은 유명인들의 묘가 있는 산타 크로체 성당을 찾아보기로 했다.
피터 궁전에서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베키오 다리 서쪽에 위치한 알레 그라찌에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가까이에서 볼 때에는 몰랐는데, 알레 그라찌에 다리에서 바라본 베키오 다리는 마치 기차 역사와 같은 느낌이다. 레고 조각처럼 옹기종기 돌출된 상점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다리를 건너 대략적인 위치만 기억한 채 지도도 보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좁은 골목들을 걷다가 다시 강가로 빠져나왔더니, 주위와 확연히 구분되는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에 창문마다 이오니아식 원주가 기둥처럼 자리하고 있는 이 곳은 피렌체 도서관이다.
이 곳에서 머지 않은 곳에 이탈리아 고딕 건축의 걸작이라는 산타 크로체 성당이 있다. 투명한 대리석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데, 모두들 피렌체 두오모만을 기억하기 때문인지 성당 앞 넓은 광장에조차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래도 한 가지 이 곳을 기억하게 만드는 건 광장 서쪽에 위치한 젤라테리아의 젤라티다. 이제 제법 어두워지기 시작해 서둘러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했다. 알레 그라찌에 다리 앞에서 버스로 대략 20여분 가량 걸려 도착한 미켈란젤로 광장 중앙에는 <다비드>가 서 있다. 물론 모작이지만 피렌체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이 곳에서 보는 <다비드>는 시뇨리아 광장의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이 <다비드>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하지만 역시 미켈란젤로 광장의 자랑거리이자 피렌체의 하이라이트는 장밋빛 피렌체 시가지가 뿜어내는 오로라다. 흐린 하늘이 마음에 걸렸지만, 덕분에 시내는 오히려 더 고색창연해보였다. 화사한 봄꽃과 짙푸른 녹음 가운데 화사하게 피어나는 장밋빛 도시는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만들었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바라보는 피렌체 시내는 두오모 정상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두오모 정상에서는 오로지 시내만이 눈에 들어왔지만, 이곳에서는 시내는 물론이고 자연과 하늘까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아르노 강과 다리, 장밋빛 지붕, 그리고 태고적부터 있었을 높은 하늘이 숨막히는 풍경을 자아낸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아로새길 석양은 끝내 볼 수 없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슬비를 맞으며 자리를 지켜보지만,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이제 시내조차 보이지 않는다. 결국 버스에 올라 숙소로 돌아서야만 했다. 하지만 이대로 다음날을 기약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저녁을 먹고 터벅터벅 두오모로 향한다. 지금까지의 경험대로라면 이 곳 두오모 역시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리라. 비가 더욱 거세진다. 덕분에 시내는 텅 비었다. 숙소에서 두오모로 향하는 길은 좁은 골목길이라 약간은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래도 오로지 한 가지 부푼 기대를 안고 서둘러 두오모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나의 기대가 지나치게 거대했음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조명에 화려한 레이저 쇼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믿었건만, 두오모는 한낮의 화려함은 모두 잊은 듯 플래쉬를 터뜨리지 않으면 형체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로 어둠에 묻혀 있었다. 이렇게 피렌체 여행은 아쉬움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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