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페인(Spain)

스페인 여행 ② 유럽 회화의 황금기로 안내하는 '프라도 박물관'


리와 런던이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 박물관 하나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듯, 마드리드 역시 프라도 박물관 하나만으로 도시 브랜드가 2배, 3배 아니 그 이상 높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넓고 매력적인 공간은 루브르의 "모나리자"나 대영 박물관의 "로제타스톤"처럼 전체 전시물을 압도할 만한 상징물은 없지만, 덕분에 모든 작품들이 두루두루 사랑받는다. 물론 대부분의 방문객들의 시선은 가장 익숙한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3층에 집중되지만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프라도 박물관을 찾은 건 마드리드에 도착한 이튿날이었다. 일요일 아침이라 모두들 느긋하게 늦잠을 즐기겠지만, 난 전날과 마찬가지로 이날도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아또차역으로 향한다. 시계의 초침이 이제 막 9시를 넘어서는 순간, 저멀리 프라도 박물관이 보인다.

"혹시 일요일이라 개관 시간이 10시가 아닐까?" 예상했던 기다란 대기줄이 보이지 않자 더 마음이 급하다. "오늘은 법정 공휴일이나 혹은 임시공휴일 그런건 아닐까?" 다행히 문은 열려 있는데 이상하리만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일단은 정문으로 향한다. 관리인처럼 보이는 남자가 힐끗 바라보더니 종이 쪽지 하나를 건넨다.

혹시 정해진 인원만 입장이 가능해 대기표를 나눠주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스탄불의 하렘과 같은 곳은 입장객 수를 철저히 제한한다)에 얼른 묻는다. "이게 무엇이죠?" "티켓입니다." "얼마에요?" "오늘은 일요일이라 무료입니다." "정말요? 고맙습니다." 그렇다. 오늘은 일요일이지만 여느때처럼 9시에 문을 열고, 대신 입장료는 무료다. 미리 이 사실을 알았다면 괜한 기우는 하지 않았겠지만, 대신 기쁨은 훨씬 컸다.

한결 가볍고 즐거운 기분으로 드디어 프라도 박물관에 들어선다. 안내소에 구비된 박물관 지도를 하나 집어들고, 조금 지나면 밀려드는 관람객들로 인해 초만원을 이룰 게 뻔한 2층으로 달리듯 오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페인을 대표하는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와 벨라즈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의 작품은 그 명성에 걸맞게 단독관으로 분류되어 있다. 고야의 작품이 모여 있는 고야관의 최고의 작품은 단연 <마하(Maja)>다. 동일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을 인물화와 누드화로 각각 표현한 이 작품은 굳이 회화를 모르더라도 충분히 흥미롭다. 특히 모호한 듯 선명한 그만의 필체는 지금 봐도 신선하고 세련돼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작품 외에도 그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지만, 나의 시선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의 드로잉들이었다. 그냥 막 영감이 떠오른 듯 끄적거린 듯한 드로잉들도 있었고, 개중에는 이제 색만 입히면 될 것 같은 완성도 높은 작품들도 있었다. 손바닥 만한 종이에 낙서하듯 그렸는가 하면,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자로 잰듯 사람들을 채워넣기도 하고, 때로는 그리다가 말기도 한 모양이다.

고야라는 대가의 드로잉관은 마치 이미 상영된 영화의 메이킹 필름을 보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그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가깝게, 그의 느낌을 쫓아 감상할 수 있었다.

고야에 못지 않게, 아니 언제나 그보다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역시 벨라즈케스다. 그의 대중적인 인기를 입증이라도 하듯 고야관에 비해 벨라즈케스관에는 그 시간에도 사람들로 가득하다. 벨라즈케스의 대표작인 <궁정 시녀들(Las Meninas)>은 역시 명불허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의 또다른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마르가리타 공주는 이 작품에서도 시선의 중심에 서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만큼은 주인공이 아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보는 이들은 커다란 화폭 속 모든 피사체에 시선이 간다. 그리고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벨라즈케스와 화폭 한쪽 귀퉁이에서 피곤해보이는 개에게 발로 장난치는 소녀의 모습은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이들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의 작품은 무척 많았다. 틴토레토나 카라바조의 매너리즘적 시선도 근사했고, 다이크나 뒤러처럼 건조한 느낌의 인물화로 대표되는 네덜란드, 독일 회화 작품들도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 밖에 푸생이나 루벤스처럼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하는 화가들의 작품들이 박물관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프라도 박물관에서 보낸 대부분의 시간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작품을 찾는 과정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엘 그레코의 매너리즘 화풍에 관심이 많다. 그의 초기작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리 만무하다.

생각 같아서는 그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보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전시된 공간별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보기로 결정했다. 큐레이터가 누구든, 분명 이렇게 구분한 데에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엘 그레코의 초기작은 내가 좋아하는 매너리즘적 화풍은 거의 없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느낌이 묻어났다. 지나치게 선명한 색상과 너무도 사실적인 필력은 벨라즈케스의 작품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의 초기작 중 유독 나의 시선을 잡아 끈 작품은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The Knight with a Hand on His Chest)'다. 검은색 배경과 검은색 복장 때문에 더욱 창백해 보이는 얼굴, 그리고 그 얼굴과 거의 비슷한 구도와 느낌을 자아내는 오른손이 마치 샴 쌍둥이 마냥 내 눈의 초점을 분산시켰다가는 또 금새 겹쳐놓는다. 엘 그레코는 이 작품의 느낌과 전혀 상이하면서도 비슷한 분위기(특히 손모양)의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The Christ with the Cross)'를 그로부터 12년 뒤에 그렸는데, 그 작품 역시 프라도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중적인 사랑은 받는 그의 초기작 '삼위일체(The Trinity)'도 평론가들의 평점 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화려한 색채와 안정적인 구도는 그의 회화적 기초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준다. 다만 내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중 하나인 '검은색의 향연'은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작품은 1612년작 '예수께 경배하는 목자들(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이다. 다른 거장들이 동일한 주제로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에 주력했다면, 엘 그레코의 작품은 역동적이면서 긴장감을 자아낸다.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화가인 카라바조의 관능적이고 사실적인 표현만큼이나 신선하고 파격적인 표현이다.

프라도 박물관의 산책은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해 오후 3시가 다 돼가는데도 끝날 줄 몰랐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꿈틀대는 "공짜"에 대한 욕심은 결국 나를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로 안내했다. 예상대로 소피아 왕비 미술 센터는 티켓 없이 입장이 가능했다. 다만 입구에서 카메라를 압수(솔직히 맡겨야 하는 것이었지만, 강제적이라 이런 느낌이 들었다)하는 바람에 영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 곳에는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놀라운 경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의 <게르니카(Guernica)>. 지금 다시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분명한 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난 피카소의 작품들을 이해할 만큼 충분한 "미적 학식"을 갖고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처럼 교과서를 통해 들은 거장의 이름이나 무슨무슨파라고 불리우는 미술사조 정도만 겨우 기억한다. 내가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며, 그 대부분은 매너리즘 시대를 대표하는 틴토레토, 엘 그레코, 카라바조, 그리고 에공 쉴레에 치우쳐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따라서 피카소가 창조해 낸 추상화는 여전히 멀고도 낯선 분야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루브르를 찾는 이들이 의례 <모나리자>를 찾듯 내게는 유명한 작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미적 학식이나 취향, 심지어는 미술 자체와도 상관 없었다. 그냥 수많은 역사 필름을 연결해 놓은 듯 그 자체만으로 역사와 정치, 그리고 문화를 대변하는 느낌이다.

내가 이처럼 꼼꼼히 한 작품을 살펴본 적은 지금껏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냥 나도 모르게 작품을 바라보고, 느끼고, 기억할 뿐이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피비린내는 이 작품의 배경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내게 조금은 충격이었다. 분명한 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이 작품을 통해 추상화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르니카>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벌써 폐관 시간이 다 된 모양이다. 관람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일어서고, 관리인들의 무전기가 시끄럽게 울려댄다. 조금 지나자 관리인이 시계를 가리키며 나머지 관람객들을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한다. 프라도에서 늦게 출발하긴 한 모양이다.

비록 저녁이지만 아직은 환한 탓에 시내를 어슬렁거릴 여유는 충분했다. 그러나 무엇을 봐도 그 감동은 크지 않으리라. 차라리 광장 한켠 카페에 앉아 오늘 만났던 거장들과 시원한 샹그리라 한잔을 기울이리라. 사과향 샹그리라의 달콤한 향은 행복한 하루를 정리하기에 정말 탁원한 선택이었다. 지금도 가끔 마요르 광장 한켠의 그 레스토랑이 무척이나 그립다.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