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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Spain)

스페인 여행 ③ 중세 도시 '톨레도'로의 여행


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라면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사진으로 먼저 본 톨레도는 마치 중세시대 어느 한 시점에 멈춰버린 듯 무채색의 건조한 도시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진들이 결코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톨레도 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을 때부터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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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톨레도에 오기까지 쉽지 않았다. 쉽게 찾을거라 예상했던 버스 정류장은 '공사중'이라는 의외의 암초를 만나 처음부터 삐걱 거렸다. 보통 공사 중일 때에는 대체 이용 가능한 정류장 명을 적어놓기 마련인데, 이 곳에서는 어떠한 안내문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한 몇몇 관광객들이 현지인들을 붙잡고 "톨레도"를 외쳐댔지만 누구 하나 시원스레 답해 주는 사람이 없다.

관광객 중 한명이 간신히 몇마디 스페인어를 알아듣고 임시 버스정류장을 찾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버스는 정해진 버스정류장에 서지 않고 "비어 있는" 정류장에 선다는 것이다. "톨레도"에 가고 싶다면 일일이 버스 행선지를 물어야만 가능하다는 얘기다. 다행히 그 사이 톨레도를 가기 위해 모여든 관광객이 적지 않아 그들 사이에 묻혀 겨우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한번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버스에 올라 티켓에 기재된 자리를 찾는데, 도무지 좌석 번호를 찾을 수가 없다. 짐을 두는 선반에도, 의자 손잡이에도, 좌석 뒷편에도 번호가 없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서성대자 한 사람이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킨다. 좌석 번호는 창문 아래에 작고 옅은 글씨로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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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전부터 이렇게 진을 빼서인지 버스 안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톨레도역에 도착해 건물을 나서는 순간, 내 선택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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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는 참으로 정적인 도시다. 스페인 여기저기가 모두 활동적이고 힘에 넘쳐 보였다면, 톨레도는 관광객들마저도 차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지도를 펼쳐들고 드디어 "중세 탐험"을 시작한다. 오후 7시경 마드리드행 버스 티켓을 이미 끊어 놓은 상태라, 조금은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마음이 급하면 집중력도 흐려지게 마련이다. 오전에 시간을 많이 허비해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것들을 보려고 하다보니 어느새 지도에 표시된 "관광지"만을 돌아보고 있다. "아니 누구보다도 자유여행의 즐거움을 설파하던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지?" 아직 차시간은 제법 남아있으니 지금이라도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우선 아직 못 간 곳은 포기하고, 이미 둘러본 곳들을 다시 가기로 한다.

알까사르 요새는 일단 포기다. 그 보다는 방금 전 스치듯 지나온 대성당으로 향한다. 거리만 놓고 보면 알까사르 요새에서 대성당까지는 교회 하나만 지나면 되는 짧은 길이다. 실제로도 남서쪽으로 조금빡에 걷지 않았는데, 벌써 성당 첨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음의 여유는 시간마저 조절하는 모양이다. 금새 대성당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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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대성당은 이 작고 아담한 마을과는 달리 거대하고 웅장하다. 고딕풍의 뾰족한 첨탑이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전혀 이 곳과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500여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탓에 이제는 주위의 건물들과도 제법 어울리는 세월의 향기가 묻어난다.

특히 안에 들어서면 그 느낌은 더욱 강렬하다. 앞뒤로 높게 자리잡은 장미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바로크풍의 고풍스런 병풍(altar)은 프랑스의 어느 성당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나의 초미의 관심사는 톨레도를 그토록 사랑했던 엘 그레코의 작품이다. 예수를 주위의 구경꾼들보다 아래에 그렸다고 종교 재판까지 하고, 엘 그레코를 투옥까지 시켰던 그 유명한 작품 '12사도와 그리스도의 탈의(Twelve Apostles and Spoliation of Christ)'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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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그의 초기작답게 인물에 대한 외적 변형은 보이지 않지만, 색감이나 표현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심리적인 변형은 벌써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예수 주위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사람이 아닌 그림자 혹은 좀비와 같은 느낌이다. 심지어 예수의 발밑에 서 있는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까지도 그렇다. 그리고 그들 뒤로 보이는 창들 역시 사탄의 뿔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에서 오로지 정상적인 인물은 핏빛처럼 붉은 천을 휘감은 채 무언가 갈망하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예수, 그 뿐이다.

성당을 나서자, 마침 성당 앞 광장에서 인상적인 공연이 펼쳐진다. 대부분의 거리 공연이 그러하듯 이들은 일종의 판토마임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테마는 "모델"이다. 카메라를 꺼내는 사람을 발견하면 우르르 몰려가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바닥에 눕기도 하고, 발레리나나 재즈댄서 흉내를 내기도 한다. 덕분에 잠깐이나마 크게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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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가 살았던 집과 미술관을 갈까 싶어 시계를 꺼내 본다. 아직 시간적인 여유도 있고, 어차피 조그마한 마을이니 이리 저리 걷다보면 마주치겠지 싶어 지도를 가방에 넣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지도를 시야에서 없애버린 건 이 날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다. 미로 같은 톨레도 시내를 걷는 재미에 빠져, 결국 엘 그레코의 집과 미술관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다지 개의치 않았던 건, 톨레도 시내를 헤매는 일이 낯설면서도 무척이나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톨레도의 골목 골목은 빛바랜 사진처럼 낡았으면서도 멋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고풍스런 외벽에 잔뜩 페인트를 발라놓은 베란다가 거슬리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작고 화사한 화분 몇개면 그 자체로 하나의 프레임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다만 간혹 눈에 띄는 총탄 자국은 과거 스페인 내전의 기억을 상기시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사실 이 곳에 하루 정도 머물렀어야만 했다. 이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도시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고 돌아가는 건 일종의 "범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건, 겨우 들고 온 카메라 외엔 모든 짐이 마드리드 숙소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버스 터미널로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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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버스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다. 오전에 서둘러 오느라 버스를 타는 바람에 놓쳤던 태양의 문을 들러보기로 한다. 한적한 타호 강을 끼고 천천히 산책하듯 걷는다. 다들 저녁을 먹고 있는지 거리는 한적하다 못해 휑한 느낌마저 감돈다. 낮 시간 동안 북적거리는 곳들을 돌아다녀서인지 이런 기분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솔직히 태양의 문은 유심 있게 살펴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다 할 관광상품으로 개발할 생각이 없었는지 표지판조차 없다. 그 때문에 더더욱 초라해 보였지만, 태양의 문은 제법 운치 있는 모습이다. 특히 이 문으로 바라보는 톨레도는 정말이지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태양의 문을 지났으니 이제 5분 정도만 걸으면 알깐따라 다리를 찾을 터였다. 여기에서 이 날의 두 번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시간 계산을 잘못하고 여유를 부리다가 알깐따라 다리는 고사하고 길까지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다리고, 성당이고 상관 없이 7시 안에 톨레도 역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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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마음이 급하면 일이 더 꼬이는 법이다. 톨레도 역으로 향하는 버스는 20여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 이제 마드리드행 버스 시간까지는 겨우 20분도 채 남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하염없이 시계만 쳐다보기를 반복하던 그 때, 저멀리 버스가 보인다.

톨레도 역으로 향하는 버스는 내 예상과는 달리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마드리드행 버스를 놓치지는 않았다. 긴장이 풀리자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