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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Spain)

스페인 여행 ⑤ 화려한 알함브라 궁전의 기억 ‘그라나다’


페인 그라나다는 알함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곳이다. 나 역시 그라나다를 찾은 이유는 순전히 알함브라를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라나다는 기대 이상의 감동을 준 알함브라 궁전 외에도, 다른 유럽과는 전혀 다른 이국적 향취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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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에 도착한 시간은 대략 오전 9시경. 기차 길 옆에 위치한 코인 라커에 짐을 넣으려는데, 지금까지 본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영어 한 마디 적혀 있지 않은 라커를 붙잡고 씨름을 하던 중, 청소부 아저씨가 힐끗 쳐다본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가벼운 인사(올라, hola∼)를 건네며, 도움을 청했다.

궁하면 통한댔던가? 아저씨는 이런 일이 늘상 있었다는 듯이 동전을 받아 쥐고, 근처에 있는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다. 그러자 그 곳에서 독특한 모양의 코인이 하나 나온다. “그렇구나. 이걸 넣어야 문이 잠기는구나!” 새삼 뭔가를 발견한 듯한 뿌듯함에 '그라시아스(Gracias)'를 남발하며 기차역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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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자에는 기차역에서 11번 버스를 타면 알함브라 궁전을 갈 수 있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기차역 앞 널찍한 길을 따라 대로까지 걸어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11번 버스를 기다린다. 11번 버스는 채 몇 분 기다리기도 전에 벌써 도착했다. 스페인 어느 버스나 그렇듯이 그라나다에서도 안내 방송이 없으니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둘러봐도 제법 궁전 같은 곳은 없다. 그렇게 30여분을 끌려다닌 끝에 다시 그라나다 기차역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11번 버스는 순환버스였다. 버스 기사에게 한번쯤 물었어야 했건만, 지나친 느긋함이 황금 같은 “30분”을 낭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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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느니 택시를 타겠다는 생각에 택시를 잡아타고 알함브라 궁전으로 향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라나다의 택시비는 저렴했다. 10여분 이상 탔는데도, 요금은 3.5유로 정도. 좋아진 기분에 4유로를 택시비로 던지고 들어간 알함브라 궁전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다행인 건 매표소가 넓어 안으로 들어서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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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계속 머리속을 맴도는 노래 한구절을 읊조리며 들어선 알함브라 궁전. 나자리스 궁전의 입장 시간이 이미 정해져 있는 터라(티켓에 입장 시간이 적혀 있는데 이 시간 이후에는 입장이 불가능하다), 들어가기 전 구매한 안내서를 따라 우선 좌측으로 방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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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로 무수히 많은 조그마한 방들(목욕탕으로 추정되는 방도 있었다)을 거쳐 가장 먼저 접한 곳은 까를로스 5세 궁전. 코린트식 오더가 원을 이루고 있는 이 궁전은 2층 구조의 건축물이었는데, 반 개방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봐서 아마도 왕족들의 회당이나 기도실 같은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나 싶다.

까를로스 5세 궁전을 지나 계속 직진하면 알함브라 궁전에서 가장 오래된 알까사바를 만나게 된다. 사실 알까사바는 그다지 눈에 띄는 모습은 아니다. 다만 벨라의 탑에서 보는 그라나다는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아름답다. 700여년 전의 화려했던 이슬람 문화는 건축 양식에서부터 구조에 이르기까지 도시 곳곳에서 여전히 숨쉬고 있다. 알까사바의 낮은 성벽에 걸터 앉아, 빛바랜 사진마냥 묘한 향수를 자극하는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본다.

잠시 쉬었을 뿐인데 벌써 나자리스 궁전 입장 시간이다. 서둘러 나자리스 궁전으로 향한다. 시간이 적힌 티켓을 보여 주며, 사람들에 밀려 안으로 들어선다. 나자리스 궁전은 솔직히 글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소름 돋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낯선 무언가에 대한 심리적 공포라기보다는, 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충격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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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뜨개질을 한 듯한 벽들과 보석을 세공해 놓은 듯 아름다운 천장, 그리고 무척이나 공을 들인 듯한 정원과 연못에 이르기까지 나자리스 궁전은 하나의 정교한 공예품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한 곳을 둘러봐도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되는 이 곳은 과연 알함브라 궁전의 하일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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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리스 궁전의 마지막 코스인 두 자매의 방을 지나 왕궁을 빠져 나오면 마지막 코스에 꽃들로 장식된 정원이 펼쳐진다. 지금까지의 탄성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이 곳 역시 아름다움이나 감동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다만 아쉬운 건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루트를 따라 옮겨다니다 보니 느긋하게 곳곳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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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궁전의 마지막 코스는 헤네랄리페 궁이다. 수많은 정원과 산책로를 걸어 도착한 헤네랄리페 궁은 알함브라 궁전 입구와 맞닿아 있지만, 가장 나중에 보게 되는 장소다. 하지만 늦게 보게 된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건물들을 돌아다니며 힘겹게 걸었다면 헤네랄리페 궁에서는 마음껏 물소리를 들으면 자연의 향취를 느끼면 되기 때문이다. 헤네랄리페 궁은 자연 한 가운데 위치한 정자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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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 이상 알함브라 궁전을 돌고 나서야 겨우 누에바 광장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기대 이상의 흥분 때문인지 맥이 풀려 딱히 가고 싶은 곳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누에바 광장 벤치에 앉아 잠시 다리를 쉰 후 다시 길을 찾아 나섰다. 일단은 무작정 걸었다. 알바이신 지구니, 대성당이니 이런 거 생각 않고, 그냥 이 독특한 도시의 향취를 느껴보려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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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라나다는 생각보다 미로 같은 길이 많았다. 게다가 휴가철이 아니어서인지 길에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노천 카페는 점심 시간이 지나서인지 텅 비어 있었고, 근처를 통과하는 버스에도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찾기 어렵다. 결국 지도에 커다랗게 표시된 대성당과 왕실 예배당을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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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대성당은 여타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유난히 황금빛이 많다. 넓고 높은 것까지 닮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커다란 성가책을 볼 수 있다. 비록 장식장 안에 진열돼 있어 넘겨보지는 못했지만 참으로 독특한 광경이다.

대성당의 일부인 왕실 예배당은 역사적 가치는 높다고 하지만 돈을 내고 들어서면 조금은 실망스럽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림들이 전부인데다가, 크기도 조금 작은 편이다. 오히려 왕실 예배당 바로 옆에 있는 안내소가 더 매력적이다. 이 곳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곳이지만 제법 근사한 곳이었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봤던 익숙한 세공기술이 그대로 표현돼 있었는데, 학교 같은 분위기마저 묻어난다.

이 두 곳을 둘러본 뒤에는 원데이 패스를 들고 무작정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던 도중 창가로 빗방울이 스친다. 굳이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서인지 오히려 들리는 빗소리가 흥겹기만 하다. 버스는 계속해서 도시를 돌더니 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대학교처럼 보이는 장소에 이르자 버스에 있던 사람들 태반이 내린다. 다행히 비도 멈췄고, 더 이상 외곽으로 나가는 것도 불안해 그들을 따라 내린다. 공교롭게도 내가 내린 곳은 그라나다의 또 다른 보물이라고 불리는 까르뚜하 수도원 근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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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치 않게 들른 까르뚜하 수도원의 돔 천장은 너무나 화려했다. 목이 아픈 지도 모른 채 계속 바라볼 정도로 말이다. 300년이나 걸쳐 지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닌 것 같다. 돔 아래에 서서 채광창으로 들어오는 모든 빛과 각종 조명 불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보니 괜시리 우쭐한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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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버스를 타고(그라나다는 전철이 없다) 그라나다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와 맞물리는 지역으로 일단 이동하기로 했다. 솔직히 버스 노선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어디가 어디인지 몰랐지만, 내가 찾는 버스가 반대쪽으로 지나가기만 하면 내릴 참이었다.

다행히 그 지역에 정확히 내렸는데, 이 곳도 제법 근사하다. 잠시 주위를 둘러 볼 참으로 천천히 이 곳 저 곳을 살피고 있는데, 알고 보니 내가 내린 곳은 그라나다 의과대가 위치한 곳이었다. 예기치 않은 일정이었지만 다시 여기에서 시원한 분수도 감상하며 늦은 오후를 보냈다.

그리고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왔는데, 이 곳에서 그라나다 역까지는 대략 4개 정류장 정도의 거리다. 걸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그냥 느긋하게 버스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1시간 가량을 기다린 끝에 버스에 오른다. 이렇게 그라나다의 하루도 아쉽게 지나간다. <혁>